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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J Apr 28. 2024

신이시여, 저 마음을

story 9. 어떠한 형태로든 망가져있을 우리의 마음들을

어떠한 형태로든 손상되고 더러워졌을 그들의 마음들을.
깨지고 다쳤을 나의 영혼을.

2019.10.20 (08:30) Logroño-Navarrete (12:40) (13km)


오전 여덟 시 반에 길을 나섰는데 갓밝이의 냉기가 아직 새벽 같았다. 검푸른 하늘 밑으로 흙빛의 건물들이 우뚝 솟아 붉게 보였다. 공기가 조금씩 차가워지고 있었다. 더위와 추위를 느끼는 피부는 본래 사람의 것이라 말하듯 조금씩 차가워지는 계절은 건물의 모퉁이를 타고 무심히 흘러가는 듯했다. 거기까지 생각이 닿았는데 그 후로 흘러간 것들은 잘 기억이 나질 않는다. 아무 생각이 없었던 것도 같다. 괜히 멈춰 서서 신발끈을 고쳐 매고는 인적 드문 길을 따라 도시를 빠져나갔다.

검푸른 하늘 밑으로 흙빛의 건물들이 우뚝 솟아 붉게 보였다.

순례길은 산티아고를 향해 나 있는 유목민의 길이다. 기꺼이 길에 오른 사람들은 걷고 또 걸으며  그 생활에 적응해 간다. 길도 날씨도 평탄치 않은 대자연의 길 앞에서 우리는 서로에게 기대고, 가끔은 스스로에게 의지해 걷는다. 그렇게 매일을 걷다 보면 낯익은 뒷모습이 생기고 반가운 얼굴들이 늘어간다. 하루에 평균 25km를 전후해서 걷고, 필요한 물품을 구할 수 있는 마트나 기름진 음식으로 배를 채울 수 있는 식당이 있는지에 대한 것들을 감안하여 비교적 큰 마을에 머무르는 것을 선호하기에 길에서 놓친다고 하더라도 마을에서 심심치 않게 마주치기도 한다. 지금 생각해 보면 필요한 것도 없고 먹고 싶은 음식도 없을 때에도 구태여 큰 마을로 향했던 것도 같다. 그럴 때엔 꼭 사람이 필요했던 것이리라. 우리는 그렇게 한 마을에서 생활하는 사람들 같았다. 모두 함께 산티아고로 향하는 유목마을의 이웃들. 별다르게 순례길에서 만난 사람들을 정의하지 않아도, 순례길에는 ‘기(期)‘비슷한 것이 있는 듯했다. 이따금씩 그 한 무리들의 기수를 빠르게 걷는 사람들이 지나쳐갔다. 저들은 저들만의 기수가 있을 것이었다.

마을을 빠져나오는 길에 마주쳤던 순례자 동상과 로터리를 지나며 만났던 건물들

하루 종일 걷는 것이 꽤나 육체적으로 고단한 일이니 만큼, 그 고행에 ‘사람’마저 괴롭다면 평소보다 견디기 힘든 것이 사실이다. 겪은 바 카미노 위에서 만나는 사람들에게 악의란 없는 듯 하나, 대단히 다양한 부류의 사람이 존재한다는 건 확실하다. 그중 악의 없는 말똥 한 눈망울로 내 무의식 중에 숨겨진 얄팍한 감정을 거슬리게 하는 신기한 사람들이 있다. 미간이 찌푸려지는 확실한 불호를 느끼면 부러 돌아서 피해 가기라도 하련만, 이런 경우의 사람들은 참 애매하다. Logroño를 빠져나오고 얼마 지나지 않아 며칠 전부터 간간히 마주쳐 인사를 나눴던 K를 만났다. K는 나와 몇 마디 채 나누지도 않고는 기다렸다는 듯이 줄곧 누군가의 흉을 보기 시작했다. 나 역시도 카미노 동네의 일원이었기에, K의 입에서 흐르는 악담의 대상들이 대체로 내가 아는 사람들이었다. 처음에 그 대상은 내가 엊그제 마주쳤던 이탈리아 부부에 대해서였다. 그 남편 되는 사람은 순례길엔 통 어울리지 않는 카우보이 모자를 썼다며, 누가 멋지게 봐주기를 갈구라도 하듯이 순례길을 걷는 것에 대해 철학적이고 근본적인 문제점을 제기했다. 자연스레 그 문제는 그의 아내로 옮겨가 그녀도 별반 다를 것 없다고 했다. 이탈리아 사람들은 무언가 불필요한 자의식이 강하다고 했던 것도 같다. 그다음엔 혼자 걷는 대만 여자에 대해서 불평을 늘어놓았다. 영어도 한 마디 할 줄 모르고, 스페인어는 두 말할 것도 없다며, 자기가 애써 구글 번역을 돌려 중국말을 건넸음에도 돌아오는 말 한마디 없었다고 했다.


나는 멋쩍게 웃으며 하나씩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다음 마을이 가까웠기를 간절히 바랐다. 난 이 마을에서 잠깐을 쉬어갈 거라 이르면 K가 잽싸게 다음 희생자를 찾아갈 거라 믿었다. 예상은 무심히도 비켜갔고 K는 간단히 요기를 마치고 커피 한 잔을 다 비울 때까지 내 옆에 앉아 시종일관 다른 사람에 대한 넋두리를 늘어놓았다. 누군가의 코골이에 대해 논평하다, 또 다른 누군가의 개인적인 이기주의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하더니 그다음엔 비틀어진 나뭇가지만큼이나 말라서 큰 짐을 지고 걷고 있는 것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마음이 저려오기까지 하는 백발노인에 대해서도 냄새가 고약하다는 욕지기를 뱉기 시작했다. 순례길을 걸으며 피레네 산맥을 넘었고, 페르돈 고개에선 발목까지 헌납했으며 밤마다 하늘이 떠나가는 코골이에 베개를 양옆으로 머리를 욱여넣기까지 했던 일이 부지기수였다만 단연 이 날이 제일 힘들었다. 쉴 새 없이 종알대는 옆모습을 보고 있노라니, K가 내일 또 다른 누군가를 만나면 나에 대해 어떤 불평을 늘어놓을지 궁금해졌다. 그러다 사뭇 K가 불쌍해졌다. 왜 스스로를 저렇게 힘들게 만드는 걸까. 그 입에 오르내리는 사람들도 자신을 좋아하지 않을 거라 믿고 있는 것은 아닐까. 나에겐 그것이 자신만의 외로움을 달래려는 방어본능처럼 보였다. K는 언제나 혼자였을 것이다. 언제나 주변 사람들을 진심으로 환영하고 사랑해 본 적 없을 것이다. 그 자신 역시 사랑받아본 적 없을 것이다.

떠들어대는 K옆에서 괜히 찍어본 표지판

너무도 간절히 K를 벗어나고 싶었기에 13km 되는 Navarrete에 도착하고서 K에게는 발목 탓을 둘러대며 오늘은 여기까지만 걷겠다고 말했다. 고작 오후 1시를 막 넘긴 시간이었다. 혹여나 K도 옳거니 하고 하루 쉬어간다며 가방을 내려놓을까 봐서 등골이 오싹했다. 다행히 K는 아쉬운 내색을 비치며 내일 만나자는 인사말을 건넸다. 정도를 막론하고 모두를 증오하는 K에게 나라고 마음에 드는 구석이 있었을까 싶어 그 말은 으레 하는 말 같았다. 인사치레 거나 진심이거나 어느 쪽이든 중요하지 않았던 것이, 적어도 나는 K를 두 번 다시 마주치고 싶지 않았다. 그 후로 K를 몇 번 더 마주쳤지만 대화를 나누진 못했다. 내가 먼저 K를 찾으면 잠깐 몸을 피했다 다시 걸었고, K가 먼저 나를 찾으면 나는 누군가와 항상 함께 있었다. 그는 무리에 끼고 싶어 하지 않는 눈치였기에 그저 인사만 하고 지나갈 뿐이었다. K는 언제나 혼자였다.

Navarrete, Iglesia Santa María de la Asunción

마을 어귀를 조금 걷다가 홀린 듯 성당에 들어갔는데 미사가 시작되고 있었다. 본래 천주교는 아니지만 카미노를 걷는 만큼 좋은 기회인 듯했다. 그렇지 않더라도 종교가 한 나라의 문화를 결정짓는 가장 큰 요인 중 하나이기에, 어느 나라를 가던지 그들이 믿는 신을 규견하고 싶다는 생각도 있는 터였다. 개인의 신앙을 위해 찾는 축원의 장막 안에서 가장 순수한 형태의 영혼들을 만날 수 있을 것도 같았다. 어쩌면 K를 대신해 회개라도 하고 싶은 마음이었는지도 모른다. 혹은 나는 듣기만 들었을 뿐 아무 말하지 않았다고 변명을 늘어놓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성당 안은 금칠을 해놓은 듯 황동빛으로 반짝였다. 드높은 천장은 까마득히 멀었고 그 휑뎅그렁한 공간을 성가의 울림이 가득 메웠다. 너무도 거룩해서 엄숙한 분위기였기에 한낱 체험학습 삼아 이곳을 찾았다는 것이 미안쩍었다가도, 스페인어로 이어지는 설교와 기도말들을 옴짝달싹 않고 듣고 있자니 좀이 쑤셔서 눈동자가 제 멋대로 데굴데굴 굴렀다. 사제의 말을 따라 자리에서 일어나고, 자리에 앉고, 일어나기를 반복했다. 안 그래도 무릎이 죽상이었던 터라 가만 서 있자니 연골이 다 뻐근했다. 잠깐 ‘밥이나 먹을걸’하고 생각하다가, 방금 전 헤어진 K의 목소리를 떠올리고는 다시 눈을 감고 가슴 앞에 공손히 손을 모았다.


미사가 끝나고 어수선한 장내를 살며시 빠져나왔다. 혹여나 순례자들을 불러 세울까 싶어 고개가 절로 수그러졌지만 기우였다. 밖으로 나오니 빗방울이 굵어져 있었다. 1시에 걸음을 멈춘 탓에 기운이 남아돌아 동네를 쏘다니고 싶었지만 한기가 짙어지는 날씨에 생각을 고쳐먹고 앞에 보이는 식당엘 들어갔다. 간단히 먹으려고 작은 Tapas를 시켰는데 공연히 입맛만 돋운 덕에 세 가지 음식을 더 시켜 먹었다. 옆자리에 있던 와파리 와 필, 그의 아내를 만나 잠깐 이야기를 나눴다. 오늘 만났던 K에 대해 이야기를 할까 하다가 입꼬리만 한 번 쭈삣거리곤 머리에서 털어버렸다. 똑같은 사람이 되고 싶지는 않았다.

Tapas (사진을 찍지 못해 구글에서 퍼왔다.)

숙소에 와서 스트레칭을 조금 하다가 부른 배에 몸이 노곤했는지 그대로 잠이 들었다. 하루종일 오한이 있었던 터라 쏟아지는 잠을 내버려 두었다. 일어나 보니 저녁 6시가 되어간다. 숙소에서 다니엘을 만났다. K에게 시달리며 소꿉친구처럼 시간을 보냈던 그녀를 한참 그리워하고 있던 터라 무척이나 반가웠다. 푼수같이 어린 티를 내는 그녀가 귀엽다. 그녀는 아마 날 귀여워하고 있겠지. 근처 슈퍼마켓을 돌아다니다 젤리와 사탕을 조금 사고 숙소로 돌아와 내일 걸어야 하는 거리를 확인했다. 그러다 앤디, 메튜, 다니엘과 함께 잠깐 근처 식당에서 저녁을 먹었다. 도대체 몇 끼를 먹는 걸까.


자기 전 침대에 누워 베개에 뒤통수를 대고 눈을 껌뻑거렸다. 이상하게 K가 자꾸만 떠올랐다. 지금도 혼자일까. 어떤 마음들이 그리도 누군가를 증오하게 하는가. 얼마나 상처받은 마음으로 그런 실속 없는 싫증을 달고 순례길을 걷고 있을까. 괜히 같은 방에서 곤히 잠든 사람들을 훑어보았다. 어떠한 보이지 않는 멍울들을 하나씩 달고 있을까. 눈을 지그시 감고 조용히 읊조리고는 이내 깊은 잠에 빠졌다. '신이시여, 저 마음을 돌아보소서' 어떠한 형태로든 손상되고 더러워졌을 그들의 마음들을. 깨지고 다쳤을 나의 영혼을.


Question 9. 살면서 가장 행복했던 순간은?

기억력이 좋은 편이 아니라 오래전 일을 기억하지 못한다. 가장 최근 행복했던 순간은 처음 순례길에 올라 눈물을 흘렸던 순간인 것 같다. 그리고 매 순간, 식당에 앉아 음식을 먹는 순간이 제일 행복하지 않을까. 매일 금주를 다짐하지만 속절없이 무너진다. 와인이 물보다 싸고 맥주가 음료수보다 저렴하니 매일 취해있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인 것도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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