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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J Apr 16. 2024

멈추지 않으면 언젠가는

story 8. 민달팽이라도 도착하니까

한 걸음, 한 걸음
나의 속도를 찾는 일

2019.10.19 (09:00) Los Arcos-Logroño (17:00) (28km)


 오늘 아침엔 고민 끝에 다음 마을로 배낭을 보냈다. 일명 'Donkey service (당나귀 서비스)'라고 불리는 서비스다. (실제 당나귀가 하는 것은 아닌 것 같아 보이지만) 전 날 머문 알베르게를 나설 때 짐을 두고, 다음 도착지가 어디인지 적어두면 그 마을의 정해진 장소에 내 짐을 가져다준다. 카미노에 오르기 전, 택시와 동키서비스는 '절대' 이용하지 않으리라 다짐했건만 뒤틀어진 발목을 핑계 삼아 딱 한 번 눈을 감고 타협을 했다. 동키 서비스는 다행히(?) 이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그저 편할 줄로만 알았는데 막상 짐을 보내버리니 그전에 쉴 수도, 더 갈 수도 없다. 여지없이 정한 만큼 가야만 한다. 자유로움이 생명이며 무계획이 최고의 계획인 순례길 위에선 최악의 단점이 아닐 수 없었다. 더구나 짐이 없으니 28km는 거뜬할 거라는 생각은 오만이었다. 오히려 하복부를 잡아주던 배낭의 허리끈이 없어서인지 통증이 올라왔고, 무리한 거리 때문인지 발목이 아팠다. 무엇보다 (순례길에 오른 지 채 일주일도 되지 않았건만) 등이 허전했다. 

동키서비스를 위해 가방에 매달아두었던 메모
순례길을 확인할 수 있는 책자. 'Buen Camino'이라는 어플이 잘 되어있어 수중에 두진 않았다.

걷다가 힘이 들어 Logroño에 도착하기 전 18.5km 정도 지점의 Viana라는 마을에서 묵고 싶었는데, 짐을 보내버려 나에겐 어떤 선택지도 없었다. 10km를 더 걸어야 했다. 그저 스스로 주문을 걸었다. 아니, 욕지거리라는 표현이 맞겠다. '닥치고 걷자'. 순례길을 걸으면 본래 신앙심을 회복하거나 본인의 과오를 회개하고 반성하는 것이 마땅한 일일 터인데 나는 욕만 열심히 했다. 동키서비스가 이런 단점에도 불구하고 순례자들 사이에 상용되는 까닭은 있기 마련이다. 대부분 이런 경우엔 택시를 타고 다음 마을까지 갔다가 하루를 묵고는 다시 마지막으로 걸었던 지점으로 돌아와 걷는다고 했다. 미련해서인지, 복잡한 상황을 싫어해서인지, 그 둘을 모두 아우르는 '단순무식'의 성격 때문인지 몰라도 그렇게는 하고 싶지 않았다. 아마 내가 믿는 신에게 욕을 할 구실이 필요한 것은 아니었을까.

풍경 속에서 방향을 알려주는 표지들

카미노 위에서의 나의 집, 나의 전부인 배낭을 떼어놓고 걷자니 비 오는 날의 민달팽이처럼 등딱지가 텅 빈 듯 공허했다. 하고 많은 미물 중에 민달팽이라니, 지구 반대편까지 호기롭게 건너와서는 고작 민달팽이를 닮았다. 그래, 멈추지만 않으면 언젠가는 도착하겠지. 비록 나는 오늘 민달팽이라 하더라도. 종종거리는 발걸음을 따라 '민달팽이'를 읊조리니 제법 마음에 드는 것도 같다. 그러고 보니 민달팽이는 그럴듯한 껍질로 화장하지 않으니까. 적나라하게 맨 몸뚱이를 드러내놓고는 꾸물거리는 곳곳마다 당당히 흔적을 잔뜩 남기니까. 


엊그제 Estella에서 마련한 지팡이를 통, 통 옮겨가며 하릴없이 걸었다. 커다란 지팡이를 휘두르는 모습에 꼭 마법사처럼 주술을 부릴 수 있을 것도 같았다. 판자를 덧대어 만든 볼품없이 긴 걸상 앞에서 휘갈겨 남겨진 낙서를 찬찬히 훑었다. 누군가의 염원을 내 키보다 높이 쌓아 올린 돌탑 주위를 서성거렸다. 밝은 하늘 위로 조각난 달이 박혀 있었고, 그 반대편 하늘은 구름 사이로 일광이 비집고 퍼져나가 산새를 뒤덮었다,라고 말하려다 고개가 기울었다. 하늘에 본래 반대라는 것이 존재하는가 하고 생각했다. 머릿속에서 객쩍은 공상들이 풍경과 함께 스쳐 지나갔다.

오늘의 나를 스쳐간 풍경들 앞에서 싱거운 생각들이 함께 흘러갔다.
영원 같은 염원을 담은 소원들이 쌓여있겠지.
'누군가 하룻밤 사이에 그렇게 많은 돌탑을 쌓을 수 있다면 그건 오직 사랑 때문이겠지. 전해오는 바에 따르면 그 돌탑들을 쌓은 사람은 사람들이 모두 행복해지는 세상을 갈망했다고 하더구나. 그런 갈망이 있었으니까 가능한 일이었겠지. 우리가 이렇게 살아 있는 것도 다 그런 갈망이 있기 때문이다.'
[김연수 -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


매일 밤 알베르게에서 우리는 아려오는 근육에 신음한다. 계단을 오르내릴 때가 가장 곤욕이다. 잔뜩 상기되고 달궈진 발바닥이 경사로를 만나 체중을 싣게 되면 찌르르한 고통이 발목을 지나 등줄기를 타고 오른다. 하나씩 디뎌 나갈 때마다 박자에 맞추어 ’ 악, 악, 으악’한다. 그 흐름도 박자도 리듬도 각양각색이다. 터져 나오는 비명조차도 각자가 말하는 언어에 굳어진 혀의 모양을 닮았다. 독일 청년 로버트는 ‘에크, 에크‘ 했고, 영국 아저씨 리는 ‘아우치, 오우’했다. 프랑스 여인 클레어는 ‘우우, 울랄라’ 했다. 우리는 그걸 한 데 모아 ‘Ugh Song’이라 이름 붙였다. 발바닥은 저릿거렸고 아랫도리는 여전히 욱신거렸지만 입가에 미소를 잔뜩 바른 채 안주삼아 와인을 마셨다. 

Logroño의 밤거리

잔을 부딪히며 우리는 '왜 카미노를 걷는가'에 대하여 자주 묻고 답한다. 그럴 때마다 나는 답한다. '글쎄, 일종의 염원을 따라온 것 같아. 동시에 체벌도. 나 스스로를 사랑하는 법을 배우러 온 것 아닐까. 그러지 못했던 죄를 용서하러 온 것일 수도.' 그러던 언젠가 누군가가 이렇게 대답했다. '카미노라는 길 위에서 자신을 혹사해야만 스스로를 사랑하는 법을 배운다는 것이 참 웃기지, 살면서 그렇게도 쉽게 다른 사람들을 사랑하면서 말이야.' 누군가 스치며 건넸던 말이 쑥 하고 떠오른다. 고개를 내미는 생각들이 뒤늦게 부푼다. 불룩하게 솟은 마음을 들고 내일도 끝없는 황무지를 걸어야 하겠지.

 

Question 8. 난 얼마나 감정에 솔직한 사람인가.

 리카르도는 90%라고 대답했다. 나는 아마 95% 정도이지 않을까. 그 후 우리는 심도 있는 토론을 거듭한 끝에, '우리는 우리 자신이 스스로 감정의 울타리를 만들고 있다'는 정의를 내렸고 각각 70%와 75%로 정정했다. 기쁘면 기뻐하고 슬프면 슬퍼할 수 있는 순간은 여행자여서 가능한 것 아닐까. 내가 카미노에서 느끼는 감정은 이따금 어색할 정도. 95% 정도로 솔직하다고 하기엔 어폐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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