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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J Oct 03. 2023

길 위의 편지

stroy 7. Keep going JJ

길 위의 보물을 찾아,
Keep going JJ!

2019.10.18 (09:00) Estella-Los Arcos (17:40) (23km)


아침에 리카르도와 함께 길을 나섰다. 브라질에서 온 리카르도는 곧 잘 웃었다. 턱 밑으로 수북하게 덮인 복슬한 털이 그가 웃을 때마다 입꼬리를 따라 같이 씰룩거렸다. 그 덕에 나이가 다섯 즈음은 더 들어 보였으나 눈동자는 미처 그런 채 하질 못했다.  함께 길을 걸으면 지나가다 보이는 포도를 따먹고, 호두를 깨 먹고, 어디로 뛰어가나 싶으면 아직 덜 여문 사과를 가져와서는 해맑게 건넸다. 그날 아침엔 어디서 따왔는지 모를 못생긴 배로 차를 만들어 먹었다. 순수한 눈을 가진 그는 누군가를 헤아려 계산하는 법도 몰랐고, 누군가의 시선을 의식하는 법도 없었다. 그래서 참 좋았다. 한평생 동안 누군가의 마음에 들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던 나의 날들을 위로받는 느낌이었다. 원래는 부어오르는 발목의 눈치를 슬쩍 살피며 Estella에서 하루 더 쉬어갈 생각이었는데, 리카르도가 참 좋아서, 잃고 싶지 않아서 이를 악물고 바스러지는 발목으로 28km를 걸었다. 헤어지기엔 너무 짧은 시간이었다.

맑은 영혼의 리카르도. 며칠동안 나의 좋은 동반자이자 친구가 되어주었다.
오늘 가야 하는 길, 마을과 마을 사이 항상 이런 표지판이 자리하고 있다.

오늘 가야 하는 길은 Estella에서 Los Arcos까지 23km 거리. 전 날 묵었던 마을을 벗어나는 목길에 항상 그날에 걸어가야 하는 길이 요약된 표지판이 있다. 오늘 걸어가는 길가의 초입새엔 와인이 나오는 수도꼭지가 있어 유명세를 탔다. 리카르도와 나는 텀블러와 가지고 있는 물통이란 물통에 담긴 것들을 모두 비우고는 와인으로 채웠다. 와인이 물만큼이나 싼 나라에서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일임을 뒤늦게 깨달았지만, 수도꼭지에서 펑펑 샘솟는 와인이니 기분이라도 무언가 다르긴 달랐다. 우리는 와인을 잔뜩 채우는 틈에 조금씩 홀짝거리다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걸었다. 그렇게 걷다가 점심식사로 콩수프를 하나 시켜 또다시 와인을 나누어 마셨다. 야외석에 앉았던 우리는 조금 쌀쌀해지는 날씨에 바람막이를 꺼내 입었다. 내 옷을 유심히 보더니 똑같은 바람막이가 있다며 가방을 뒤적이다 꺼내 보이는 리카르도. 이 무슨 우연이냐며 신기해하던 우리는 똑같이 생긴 바람막이를 헷갈린 탓에 바꿔 입었다. 그에게는 작은 나의 옷에 리카르도의 어깨가 터져버릴 듯했고, 그 어정쩡한 폼새에 배꼽을 잡고 한참을 웃었다.

와인이 나오던 수도꼭지. 순례자를 위해 아무개 와인 회사에서 무료로 제공하는 것이라고 들었다.

접질려진 발목 탓에 걸음이 느렸던 나는 알베르게에서 다시 만나기로 하곤 리카르도를 먼저 보냈다. 광활한 대지를 종종거리며 홀로 걸으니 퍽 외로웠는데, 때마침 속도가 맞는 다니엘을 만나 남은 7km를 함께 걸었다. 브라질에서 샌프란시스코로 이민을 갔다던 다니엘은 유방암 수술을 받은 후 담배를 끊었다고 했는데, 그 대신 간간히 주저앉아 대마를 말아 피웠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질 않았는데 그녀는 대마가 담배보다 덜 해로운 이유에 대해 일장연설을 늘어놓았고 나는 속수무책으로 그녀의 긴 대마 강의를 들어야만 했다.) 그녀를 기다리며 쉴 참으로 옆에 툴썩 주저앉았는데 하필이면 그게 가시 풀 위다. 한숨 섞인 비명을 내뱉다 눈이 마주친 우리는 그로부터 약 1분간 숨을 헐떡여가며 배꼽을 잡고 웃었다. 왜인지 모르게 순례길 위에선 별 일 아닌 일도 배가 아플 정도로 웃음이 난다. 한참을 웃다 다시 걷기 시작하고서 얼마 되지 않아 양 떼를 만났다. 그녀와 나는 약속을 한 것도 아닌데 그 광경을 한참 동안 함께 지켜보았다. 셈 없는 호기심과 꾸밈없는 웃음이 자꾸만 터져 나왔다. 어릴 적 소꿉놀이 친구와 보냈던 시간들처럼.

다니엘과 만났던 양 떼들

다니엘과 함께여도 힘든 건 힘들다. 다니엘의 일장 연설에 슬슬 지쳐가던 차라 점차 말수도 적어졌고 발목도 아려오기 시작했다. 이게 빌어먹을 뭐 하는 짓인가 싶을 때, 앞서 간 'Camino Family'가 남겨놓은 선물을 발견했다. 'Keep going JJ'.  길 위에 남겨둔 응원이라니. 하나씩 새겨 넣은 글자 위로 애정이 잔뜩 묻어있다. 많은 발걸음이 닿아 단단해진 흙길 위에 적힌 편지. 혹여나 글자가 망가질까 싶어, 앞서 간 모든 이들은 글자를 에둘러 조심히 피해 갔을 테다. 그 천진한 마음이 너무도 고맙고 가상해서, 누구든지 만나면 볼에 뽀뽀라도 해주고 싶은 마음이었다. Los Arcos에 도착해 선물을 남겨놓은 이를 찾으려 했지만 그 누구도 아니란다. 러시아에서 온 키도가 말한다. 'Maybe Jesus did it.' 아니 예수님이 이렇게 악필일 리 없잖아. 예수도 영어를 못하니 그렇단다. 응?

Camino Family의 선물. 아직도 선물을 남겨놓은 이는 미궁 속에 있다.

세 단어로 적힌 길 위의 편지가 속절없이 내 마음을 어지럽혔다. 앞으로 이 길 위에 남겨질 보이지 않는 편지들에 대하여 생각했다. 나는 이 길을 걸으며 어떠한 수많은 문장들의 의미들을 찾게 될까. 헤아릴 수 없는 감정들과 위로들을 갖게 될까. 그저 길을 걷다 만난 풍경 중 하나일 뿐인데 수많은 뜻이 있다. 그저 꼼짝없이 마음을 내어 줄 수밖에.

비슷한 듯 하지만 무엇 하나 똑같은 풍경이 없다.

남은 거리를 걸으며 만나는 풍경들 중 무엇 하나 같은 것이 없다. 멀리 보이는 산 능성을 따라 펼쳐지는 밀밭의 색이 비슷한 듯 하지만 사실은 난생처음으로 시선이 닿는 곳들이다. 그래서 더 광활한 듯 아름답고 애틋했을까. 지루한 적 없이 색다르기만 했을까. 우리의 일상도 반복인 듯 하지만 무엇 하나 같은 날들이 없다. 지금 생각해 보면 하루를 멀거니 지루해했던 그날들이 그저 그렇게 비슷했던 날들이 아니라 너무도 다른 변화의 닮은 꼴들이 아녔을는지.

Los Arcos로 향하며 만났던 풍경들

도착한 알베르게에서 모두를 다시 만났다. 리카르도가 만들어준 수프를 먹고, 각자 들고 온 와인을 나누어 마시고, 알베르게 앞마당에 노래를 틀어놓고 열댓 명이 모여 다 함께 춤을 췄다. 모두들 10kg 남짓한 자신만의 배낭을 짊어지고 20km를 더 걸어 도착했을 텐데 지치는 기색이 없다. 체력이 무서울 정도다. 알베르게 관리인으로 보이는 사람이 시간을 벼르고 있었는지 자정이 되자마자 우리를 좇았고 그 덕에 더 늦기 전에 잠에들 수 있었다. 이곳은 자신만의 속도를 찾고, 누군가를 받아들이거나 떠내 보내는 방법을 배우며, 자신만의 생각으로 자신만의 기억을 만드는 곳. 밤 귀가 밝아 옆집 알람 소리에도 깼던 내가 코골이에 익숙해지는 법을 배우며 잠에 든다. 알베르게의 새벽은 코골이로 하는 오케스트라 같다.


Question 7. 가장 힘든 순간은 언제야? 무슨 생각을 하며 버텼어?

 매일마다 남은 4km 즈음이 가장 힘들다. 배낭을 메고 걸으니 무릎이 아프고, 접힌 발목은 말할 것도 없다. 진통제 때문인지, 나아진 건지, 아니면 너무 아파 발목이 여전히 붙어 있는지조차 가늠이 안될 정도로 마비가 되었는지는 몰라도 그 상태로 나흘간 100km를 걸었다. 그러다 보니 남은 4km가 40km처럼 느껴지곤 하는데, 아무 생각도 들지 않는다. 너무 고통스러워 아무것도 느낄 수가 없다. 딱히 버티는 것도 아니고, 그저 다음 걸음으로 발을 옮길 뿐이다. 그렇게 알베르게에 도착해 개운하게 씻고 나면, 신기하게도 언제 그랬냐는 듯이 아무렇지도 않아 진다. 이 도시를 조금 더 느끼고 싶다는 생각만 간절하다. 다시 돌아올 수 없는 곳이기에 더 열심히인지는 몰라도 그렇게 도시를 돌아다니며 순례자들과 함께 웃고 떠들고 마시고, 자정을 향해갈 즈음 잠에 든다. 그렇게 일상을 보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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