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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J Jun 08. 2024

백수, 유랑객, 순례자

story 13. 그리고 나

 나는 오늘 하루동안 얼마나 수많은 나를 만났는가. 아, 좋아라. 나의 Camino.

2019.10.24 (09:00) Belorado - San Juan de Ortega (17:30) (24km)


호텔에서 맞은 아침은 꽤나 상쾌했다. 밤 사이 한 번을 깨지 않고 잤다. 눈을 떠 보니 8시가 다 되어간다. 9시가 되어서야 준비를 마치고 길에 올랐다. 적막한 방에서 하루를 편히 쉬었더니 몸은 개운한데 정신이 나타하다. 사람은 어려운 일엔 그토록 어렵게 적응하면서도 쉬운 일엔 쉽게 익숙해진다. 항상 그 정도를 파악하고 익숙함에 경계를 두어야 하는 이유가 그것에 있다. 비가 올 성싶어 동키서비스로 가방을 보낼 생각을 하다가 생각을 고쳐먹고 다시 등에 짊어졌다. 더구나 하늘만 흐렸다 뿐 하루 내 비는 내리지 않았다.

Belorado를 떠나 Tosantos를 지나며 만난 광경

얼마 지나지 않아 마르코와 S, G를 만났다. S와 G는 독일에서 온 사촌지간이다. 반나절 이야기를 나눴건만 미안쩍게도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다. (일기장엔 '#', '@'로 표현되어 있다. 아마도 콧등으로 떨어지는 그들의 눈매가 그 모양새를 닮아서 그렇게 적은 것 같다. '샵'과 '골뱅이'의 앞자를 빌려 S와 G로 칭하기로 한다.) 암만 사회 계급장 떼고 오른 순례길이라 하더라도 자신을 설명하는 데 무슨 일을 하는지 빼놓고 소개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S는 신문사 인쇄부에서 9년째 근무 중이라고 했는데, 어슴푸레 풍기는 잉크 냄새만 맡아도 컬러인지 흑백이지 구분할 수 있을 만큼 이골이 났다며 옅게 몸을 떨었다. G는 그런 S를 가소로이 비꼬는 눈치였다. S가 아무 말도 거들지 않는 것을 보니 G도 어딘가에 지긋한 관록이 있는가 싶었다.

아니나 다를까 질문은 돌고 돌아 나에게로 왔다. 미지근하게 직업 없는 jobless(백수)이며 여행을 떠나기 전 일을 관두었다고 말했다. 나름 재치 있는 마무리로 길어지는 말꼬리를 잘라낼 수 있을까 싶어 지금은 순례자로서 homeless(노숙자)로도 살고 있다 하니 크게 몇 번 웃어 보이고는 그럼 무슨 일을 했더랬냐고 물어온다. 난감하다. 일이라 해봤자 1년 반 남짓한 진단 회사 실습 사원 경력이 전부인 데다가, 지금이야 코로나가 몰고 온 반향으로 대중이 '분자진단'을 알고 있다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어떻게 설명할지 막막했던 탓이다. 별 의욕 없이 설명을 뱉어내고 곰곰 생각했다. 난 그들처럼 어떤 일에 이골이 날 수 있을지를. 언제쯤이나 그렇게 푸욱, 아슴하게 풍겨오는 흔적에도 나의 것들을 포착할 수 있을지를.

Santiago까지 가는 방향과 남은 거리를 보여주는 표시석들

가만 듣고 있던 마르코가 입을 열었다. '지금은 순례자'라는 말이 듣기 좋다고 한다. 자기의 직업을 따라 살아가는 동안 너무도 많은 방황을 겪었다고 덧붙인다. 길 위에서는 표시석의 노란 화살표와 동행자를 믿고 따라가기에 길을 잃을 걱정이 없다고. 그의 말끝은 흐려진 지 오래인데 네 명 중 누구 하나 쉽게 입을 열지 못했다. 표시석 속의 애먼 화살표가 평소보다 크게 보였다.

Santiago까지 544,4km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작은 마을에 도착했다. 잠시 쉬어가려 같이 카페에 걸터앉아 Cafe con leche (카페라떼)를 마셨다. 으슬하게 추운 날씨에 대비할 겸 단단히 무장을 하고는 마르코와 무리를 뒤에 두고 먼저 일어나 길을 나섰다. 한산해진 마음에 바람이 불어 괜히 엄마에게 사진을 찍어 보냈다. 몇 분도 채 지나지 않아 답장이 왔다. 생각하기 좋은 길이네,라고. 엄마는 내가 어떤 생각들을 달고 걷고 있을지 궁금하려나. 난 뭐라고 대답을 했던가. 기억의 편린들이 이제는 미처 연결되지 못하고 사라져 버렸다.

5.5€의 감자튀김과 계란, 콜라.

마지막으로 나온 마을에서 점심식사를 했다. 빽빽하게 들어찬 스페인어 메뉴판이 생경했다. 적정한 가격대로 타협을 해야 했기에 메뉴판 밑단에 적혀있는 5.5€짜리 Patatas Fritas con Huevos를 시켰다. 짙은 연주황빛의 설익은 계란 노른자를 터뜨려 감자튀김을 찍어먹었다. 녹녹한 감자튀김에 노른자의 고소한 맛이 보드라웠다. 별다른 요리를 내어온 것도 아니고 그저 감자튀김과 계란후라이일 뿐인데, 허기진 배가 찬이렸다 감칠맛 나는 한 그릇을 마파람에 게눈 감추듯 뚝딱 해치워버렸다. 가난한 순례자 주머니 사정에 부러 저렴한 메뉴를 골랐음에도 6유로를 내고 거스름돈은 받지 않았다.

12km사이 걸었던 잔잔한 숲길, 솔방울 화살표

만반의 준비를 마치고 길에 올랐다. Villafranca Montes de Oca에서부터 San Juan de Ortega까지 앞으로 12km 동안 마을은 없다. 두병의 물, 초코바 하나. 충분하겠지 뭐. 한국에서도 10km 정도는 물도 없이 걸었다. 다른 길, 다른 에너지가 필요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계속 비교하게 된다. 장황한 길 앞에서 주눅 들지 않으려는 나만의 기책이려니 싶다. 걷는 내내, 아무도 없이 나 혼자라 생각하기 편했다. 생각이라고 해봤자 정말 별거 없지만.

도착한 San Juan de Ortega 초입새

아무도 없는 산길에서 노래를 듣고, 크게 따라 부르며 춤도 췄다. 재밌었다. 골반을 씰룩거릴 때마다 배낭이 따라 흔들렸다. 아무도 보지 않을 때 나의 모습은 이렇구나. 노래 부르고 흥을 내며 춤을 추기를 좋아하는 나 자신이 퍽 귀여웠다. 춤을 추다가도 우뚝우뚝 멈춰서 고개를 돌아보며 인기척을 살폈다. 괜히 민망한 탓에 솔방울에 말을 걸었다. 그런 내가 우스워 몇 번이고 웃음이 터져 나왔다.

San Juan de Ortega, 오늘 내가 묵을 Albergue

도착하고선 알베르게에 짐을 풀고 씻었다. 슈퍼마켓 하나 없는 작은 마을이다. 알베르게 1층에 있는 bar에서 맥주를 마시고 저녁을 먹는다. 시골 마을의 밤이 영겁처럼 흐른다. 아침엔 함께여서 유쾌했고, 오후엔 혼자여서 즐거웠다. 나는 오늘 하루동안 얼마나 수많은 나를 만났는가. 아, 좋아라. 나의 Camino.


Question 13. 넌 아침을 더 좋아해? 밤을 더 좋아해?

둘 중 하나를 꼽자면 저녁이다. 사실 회사생활을 할 때는 출근이라는 명목으로 아침을 원망했던 것도 같은데, 그게 아니라도 저녁이라고 하겠다. 아침은 생명력이 넘치며 육체가 역동하는 시간이다. 그렇기에 움직여야 하고 부단히 살아내야 하는 일련의 숙제가 주어지는 셈이다. 걸핏하다간 나태라는 논평의 대상이 되기 쉬운 아침이 나는 부담스럽다. 점심 먹고 찾아오는 나른하고 여유로운 시간이 좋다. 아침을 열심히 살아내고 반나절 추진의 시간을 무사히 마치고 나면, 마음이 힘을 풀고 넉넉해진다. 그런 밤을 나는 좋아한다. 더욱 깊은 사색을 허락하니까. 별 무리가 총총히 떠오르는 새벽이면 더할 나위 없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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