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JJ Jul 01. 2024

아무것도 아닌 사이

story 17. 그렇기에 가능한 일들이 있으니

왜 나는 여태껏 누군가에게
아무것이라도 되어보려 노력했는지 몰라,
나의 쓸모는 그곳이 아니라
이곳에 있는데도.

2019.10.29 (08:00) Castrojeriz - Frómista (16:30) (25km)  


나서자마자 펼쳐진 길이 가린 곳 하나 없이 눈에 들어왔다. 향하는 길이 옅은 산맥을 따라 이어져 있었고 그 끝은 미처 헤아려지지도 않았다. 안개로 가려져 정상이 보이지도 않는 산길이라니. 벌써부터 맥이 탁 빠져 무릎이 바들거리는데 사람들은 늘 그렇듯 씩씩한 팔다리를 휘저으며 우렁찬 발걸음으로 날 스쳐 지나간다. 내색도 하나 없이 묵묵히 걷는 이들의 사연은 무엇일까. 무엇이 저들을 저리도 걷게 했는가. 게 중 어떤 이들의 마음은 절망을 닮았으리라. 아무것도 위로가 되지 않는 세상에서 숨 쉴 길을 찾아 고행으로 향하게 만든 그 감정은 하루하루가 지나며 희망으로 바뀌고 있을 것이었다. 내가 그렇듯이. 터질 듯한 배낭 위로 양말이나 속옷, 수건 따위가 주렁주렁 매달려있다. 어깨를 짓누르는 삶의 무게에 깜찍한 희망들을 저리도 달고 가는가...

길을 나서자마자 보였던 광경. 참담한 심정에 무릎이 좌우로 흔들렸다.
걷고 걸어도 가까워지지 않았던 길

날 스쳐간 사람들을 쫓아 걷고 있자니 불현듯 풍경이 나에게로부터 멀어지는 기분이 들었다. 구불구불 난 길을 눈으로 따라갈 때마다 산이 불쑥 일어나 한걸음 뒤로 성큼 물러나는 것만 같았다. 요란한 코골이에 잠자리를 설친 탓인지 몸이 무거워 배낭을 내려놓고 주저앉을 만한 곳을 찾아 두리번거리다 그만두었다. 포기하는 마음조차 포기해야 하는 곳. 앞서 지난 이들도 같은 마음이었을까. 그저 체념의 체념을 거듭한 탓에 그리도 묵묵히 걸음을 옮겼던 것뿐이었을까. 걷고 또 걷기 위해 떠나온 순례길 위에서 모두는 무언가를 내려놓고 또 그만큼의 빈자리를 채우게 될 터였다.

어제 쟁여두었던 우유와 초코볼

나무가 없으니 산이라 하기도 뭣하고 쉽사리 오를 만큼 경사가 완만한 것도 아니니 언덕이라 할 수도 없다. 여하튼 그 중간쯤 되는 무언가의 정상에서 짐을 내려두고 주변 순례자들과 함께 어제 사둔 초코볼과 우유를 나누어 먹었다. 옆이 소란스러운 듯 해 돌아보니 얼마 전 짧은 인사를 나눴던 동양인 여자 연이 아직 나는 알지 못하는 누군가의 무릎에 누워 훌쩍이고 있다. 어깨가 들썩이기까지 하는 것을 보아 꽤 오래전부터 그런 듯했다. 잠시 얼굴을 들었을 때 그녀의 눈은 퉁퉁 불어있었고 콧잔등 위로 닭똥 같은 눈물이 번지고 있었다. 뻔히 귀를 기울이자니 무안한 마음이 들어 제대로 듣지는 못했지만 그녀를 위로하고 있던 이는 '청춘은 원래 그런 거야' 하며 연신 그녀를 위로했다. 가끔은 흔들리고 쓰러질 때도 있는 거라고. 아무렴, 그렇고말고. 보이지 않게 고개를 끄덕였다. 길을 걷는 이유를 나누다 그 속에 묻어두었던 사연까지 닿은 모양이었다.


그 광경을 보고 있자니 그런 연이 퍽 부러웠다. 홀연 무엇 하나 나눠주고 나눠 받는 법도 모르는 채 하루하루 살아가고 있다는 생각에 몰려오는 슬픔. 난 언제부턴가 주저하는 마음으로 속에 있는 무언갈 줄 수도 받을 수도 없게 되어버린 건 아닐까. 가끔씩은 속마음을 내어주고 또 누군가의 이야기를 들으며 서로의 숨결을 조금 나누어 가지는 일들이 필요한 것을 알면서도. 누군가를 의심할 필요 없는 시간들을 난 내심 그리워하고 있었나 보다. 다다른 생각 끝에 그런 순간들을 위해선 우리 모두 유한한 관계 속에 있어야 한다는 것을 깨닫는다. 각기 다른 마음으로 같은 목적지를 향하는 사람들과의 그 불완전한 동지애가 있기에 가능하다고. 우린 서로의 인생에 아직은 아무것도 아니기에 가능한 일임을 알게 된다. 목욕탕에서 나체로 스치는 사람들의 시선에 우리는 상처받지 않으니까. 내일 만날 수도, 또 만나지 못할 수도 있는 저들과 나의 관계는 아직은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에 빗장조차 걸 필요가 없을 것이다. 다만 오늘 무릎을 내어준 청년과 연의 관계가 어떻게 이어질지 몹시 궁금해졌다. 그 뜨거운 순간이 지나고 나면 몰려올 쑥스러움의 골짜기를 어찌 헤쳐나가게 될는지.

언덕을 지나니 평지가 펼쳐져 있었다
강아지와 나누어먹은 햄버거와 감자튀김

몸이 무거울 땐 자주 앉아서 쉬어가야 한다. Itero de la Vega에 들러 점심을 해결하려 햄버거와 감자튀김을 주문했다. 어느 음식점을 가더라도 지나는 풍경과 오며 가는 사람들을 구경할 수 있는 야외테이블을 선호하기에 자연스럽게 바깥쪽에 자리를 잡았다. 따듯한 김을 모락모락 풍기며 담겨 나온 햄버거를 크게 한 입 베어 먹으려다, 발치에서 애처롭게 쳐다보고 있는 강아지와 눈이 딱 마주치고 말았다. 미처 다물 수 없었던 입을 저항 없이 와앙 벌린 채로. 무안한 마음에 고기를 조금 잘라 건네자 씹지도 않고 홀랑 삼키고는 다시 그 까만 단추 같은 눈으로 바라본다. 햄버거의 움직임을 따라 부지런히 따라다니는 그 작은 머리를 무시할 수 없어 크게 하나마저 떼어주고 나의 식사를 즐기려는데, 허겁지겁 먹어치우다 목에 걸렸는지 연신 캐액, 캐액거린다. 등을 토닥여봐도 나아질 기미가 없어 이러다 잘못되는 건 아닌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외딴 타지에서 강아지 살해자라는 죄명을 달고 돌아갈 수는 없다. 직원을 붙들고 'perro, ayúdame (개, 도와줘)'를 연신 반복해 어렵사리 끌고 나왔건만, 아. 눈을 새초롬히 뜨고는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발라당 누워선 꼬리를 흔드는 게 아닌가. 졸지에 설거지로 바쁜 직원을 불러다 강아지의 뽀얀 뱃털을 자랑한 꼴이 되었다. 아, 스페인 강아지에게 농락을 당하다니.

퉁퉁 불어버린 발에 붙은 물집 방지용 테이프
그러거나 말거나 신나 보이는 그림자

주역에서는 무평불피(無平不陂)라 했던가. 평평한 곳엔 비탈진 곳이 있듯이 비탈진 길이 끝나면 평평한 길이 있을 터. 정상을 지나 내려오니 허허벌판이다. 그야말로 아무것도 없다. 길 위에서 며칠 전 만났던 수빈, 소영씨와 짧은 재회를 했다. 에너지 넘치는 그녀들은 오늘 하루의 일정을 재빠르게 공유하고는 금방 가는 길 방향으로 사라졌다. 구름이 몰려가고 날이 개기 시작하니 풍경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질었던 길이 말라가고 있었다. 해를 받으니 축축한 빨래처럼 늘어졌던 몸도 한결 가벼워졌다.

개천을 따라 걷던 길

지나다가 만난 산드레가 L알베르게가 좋다며 당부를 하더니만 이미 명성이 자자한지 모두 여기 모여있었다. 산드레가 초대한 저녁식사에 참석하려 2층에서 계단을 내려오는데 저 멀리서 감자씨가 시커먼 먹구름을 끌고 이 알베르게로 다가오는 것이 아닌가. 순례길 위에서 편안한 잠자리를 찾아 유난 떠는 사람처럼 보일까 싶어 몇 번을 망설이다, 밑져야 본전이다 싶어 호스피탈레로에게 이야기하니 흔쾌히 감자씨를 다른 방으로 배정해 주었다. 옮겨진 방에서 같이 묵어야 하는 다른 이들에겐 미안한 일이지만 나로선 할렐루야 만세다. 부엌으로 가니 산드레가 이미 참치와 올리브를 넣은 토마토 파스타를 준비해 두었다. 어마어마한 양이었지만 대접받는 음식은 남기지 말고 모두 먹어야 한다, 는 한국인의 예를 갖추려 모두 비웠더니 부족한 줄 알았는지 또 한 팬을 잔뜩 볶아오는 탓에 부른 배가 터질 지경이었다.

아이스크림을 먹다 거행된 물집 해체식

부른 배에도 디저트 배는 따로 있다고 했던가, 배를 퉁퉁 두들기며 숙소에 돌아와서는 수빈, 소영, 새로 만난 미영언니와 함께 아이스크림을 나누어먹었다. 아이스크림이 어느 정도 비워져 갈 때 즈음, 일제히 숟가락을 내려놓고 가방을 뒤적이기에 무얼 그리 찾는가 했더니 실과 바늘, 알콜솜이 담긴 파우치를 꺼낸다. 그 표정이 비장하기까지 하다. 발바닥을 반대편 허벅지 위에 올려두고는 유심히 살피더니, 이리저리 만져보고는 얇고 가는 손가락으로 묵묵히 바늘에 실을 꿴다. 동그랗게 물이 차오른 살 밑으로 바늘을 통과시키고는 실을 대롱대롱 매달아 두곤 바늘을 뺀다. 그렇게 하면 실을 타고 물집 안에 물은 빠져나오고 다음날이면 살에 붙는다고 했다. 아무런 표정도 호들갑도 없이 잠잠히 물집 밑으로 바늘을 통과시키는 그녀들의 모습이 경건해 보이기까지 했다. 가만 보니 발 밑에 달린 물집의 흔적이 역력하다. 물집 위에 물집이 부풀고, 발의 밑창이 살과 분리되어 이리저리 겉도는데도 내색 하나 없이 나보다 빠르게 걸었다니. 조금 붉게 달아오른 것 이외엔 뻔뻔하리만치 멀쩡한 내 발바닥이 머쓱해졌다. 


엄숙한 물집 해체식 중, 누군가 내일 삼겹살을 구워 먹자며 정적을 깼다. 한껏 진지했던 분위기가 제자리를 찾았고 이야기는 자연스레 내일의 밥상을 계획하는 일로 흘러갔다. 깊은 밤 누군가 코를 골기는 했지만 크게 개의치 않았다. 어디선가 입맛을 다시는 소리가 들려왔다. 노릇하게 구워진 삼겹살 꿈을 꾸는가. 고단한 하루의 순례를 마친 사람들의 숨소리가 잔잔히 들려왔다. 새근새근 숨을 쉬는 소리가, 도롱도롱 코를 고는 소리가, 냠냠 입맛을 다지는 소리가 어둠 속의 화음처럼 버무려졌다. 각자의 바람을 담을 꿈을 꾸고 있을 테지. 나는 조근조근 잠꼬대를 하려나. 그 말은 아무렴 Buen Camino 이기를.


Question 17. 네 모습이 사랑스러워?

내가 날 사랑하지 않으면 그 누구한테도 사랑받을 수 없다는 이야기를 익히 들어 알고 있음에도 자신을 사랑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자기반성이 숙제가 되어버린 사람은 자신의 모습에 만족하고 칭찬하기보다 채찍을 드는 일이 먼저 되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이곳은 자책과 후회로 점철되는 그 통절한 시간을 한데 모아 나를 사랑하는 방법을 배우는 곳. 평생 동안 마음에 들지 않던 푹 꺼진 이마와 맥없이 벌어진 콧구멍을 가만히 바라볼 수 있는 곳. 한참을 바로 보고 있노라면 괜히 오목조목한 눈코입이 귀여워 보이기도, 사랑스러워 보이기도 하는 곳. 남이 되는 방법을 잊고 나다움을 되찾아 갈 수 있는 곳. 그런 길 위에 있기에 아무렴, 사랑스럽고 말고.

작가의 이전글 행복으로 향하는 문은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