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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J Jul 05. 2024

내가 가고 싶은 길

story 18. 누구의 이해가 필요한가

길을 잘 봐, 같은 길이지만 다른 길이지.
우린 모두 다른 의미의 길을 걷고 있어.
각자의 길, 각자의 선택. 그뿐이야. 누구의 이해가 필요하겠어?

2019.10.30 (08:00) Frómista - Carrión de Condes (16:30) (20km)


어제 장을 봐온 바나나와 빵, 우유, 요거트로 다 같이 아침을 차려먹었다. 요거트가 복병이었을까. 또 하루의 길에 올라 경쾌했던 발걸음도 잠시, 얼마 지나지 않아 아랫배부터 느껴지는 묵직한 무게가 발걸음까지 늦추더니 기어코는 아무 데서나 불뚝불뚝 멈춰 서게 만들었다. 어찌나 엉덩이를 틀어막으며 앞만 보고 걸었던지 오늘 하루의 풍경은 어땠는지 기억조차 잘 나질 않는다.

각자 다른 방식으로 존재하는 화살표들

유제품과 우유까지 양껏 먹어놓고선 화장실을 미처 들리지 않았던 것이 화근이었다. 견디고 견뎌 도착한 마을에 단 하나뿐인 레스토랑이 문을 닫았다. 이 얼마나 절망스러운 순간이었는지. 치받는 욕지기를 누르며 돌아서다 가정집이든 개집이든 아무 문이나 두들기며 화장실 한 번만 쓰게 해 달라고 빌어볼까 싶었지만 항문 끝에 대롱대롱 매달려있는 이성의 끈을 붙잡고는 그 상태로 5km를 더 걸었다. 마을이 저기 보이는데 자꾸만 멀어진다. 기술의 발전으로 달나라도 가고 없던 것도 만들어내고 온갖 질병도 치료하는 21세기에도 결국 배변욕하나 변소에 의지해야 하는 인간의 나약함이라니. 아니, 도리어 이 문제에 대해서는 원시시대가 더 자유로웠을지 모른다. 너도 나도 옆집에 걔도 어디 큰 바위 뒤편서 나뭇잎으로 해결했을 테니까. 사실 우린 아무리 시간이 지난대도 생리현상은 이길 방법이 없는 것이다. 남녀의 사랑싸움만 하더라도 그렇다. 어느 한쪽이 소홀한 탓에 연락문제로 다투게 된다면 한 마디로 정리되질 않는가. '아니, 그니까. 화장실 갈 시간은 있었을 것 아니야?'

무성히 자란 버드나무가 길 위로 아치를 만들었다.
일렬종대 서있던 숲길

화장지도 없고 가려질만한 수풀도 나무도 없어서 자연화장실은 엄두도 낼 수 없다. 그나마 울창한 숲이 나오는가 싶었는데 어찌나 일렬종대를 나란히들 섰는지 그 사이에 쪼그려 앉았다간 가려지긴커녕 되려 주목만 받게 될 것이었다. 한 발 한 발 신중을 기하며 걷고 있는데 R군에게 전화가 왔다. 벌써 퇴근을 했나. 시간이 벌써 그렇게 되었나. 식은땀이 삐질삐질 흐르는 목소리에서 예삿일이 아니라는 것을 감지한 R군은 나의 생각을 딴 데로 돌려주려는 노력으로 애국가를 불러주었다. 겨우 다다른 마을 초입에서 발견한 알베르게 겸 레스토랑에 들어가 배낭을 아무렇게나 던져두고는 곧장 화장실로 향했다. 겨우내 옥상에 널어놓은 빨래처럼 빳빳하게 굳었던 몸이 자유를 찾았고 난 그곳에서 가끔 누군가에게는 비좁고 냄새나는 변소도 천국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알베르게에서 만난 나귀. 내 마음대로 낙순이라고 불렀다.

화장실 들어갈 때 다르고 나올 때 다르다더니, 본능이 차지하던 주도권이 이성으로 옮겨가자 상황이 파악되기 시작했다. 인사도 설명도 없이 뛰다시피 화장실로 향한 것에 짓쩍은 마음이 들었으나 허옇게 질렸던 나의 낯빛이 모든 상황을 변호해 주리라 믿었다. 싱겁게 웃으며 커피 한 잔을 주문하고 마시고 있으니 순례자들이 하나 둘 도착하기 시작했다. 걸음이 느린 나를 오늘의 목적지에서나 만날 줄 알았는지 사람들이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나도 어깨만 으쓱해 보이고는 구태여 설명하진 않았다. 배변욕의 도움을 받았다고 말할 순 없는 노릇이니까. 밖으로 나가보니 나귀 두 마리와 양 세 마리가 유유히 풀을 뜯고 있다. 하얀 양들 사이 갈색 양의 투박한 꼬리가 불순 하늘로 삐죽 추켜올려지더니 초코볼 같은 똥을 톡톡 떨군다. 가뜩이나 민망스러운데 나를 골려먹는 상황에 어처구니가 없어 실소가 터져 나왔다.


가벼워진 몸과 마음으로 다시 길에 올랐다. 쏟아내고 나니 배가 고파온다. 참으로 정직한 몸뚱이가 경이롭다 못해 기특하기까지 하다. 걷다가 만난 산드레와 호세, 안드리안과 함께 식당(Bar)에 들렀다. 이름 모를 감자요리를 고르는 그들을 내버려 두고 맥주 한 잔을 주문했다. 스페인에서 나고 자란 그들의 선택을 믿는 것이 상책이다. 더군다나 감자는 삶아도 지져도 볶아도 튀겨도 감자니까 싫을 이유도 없었다. 음식이 나왔다. 포슬포슬 익은 감자 위로 마요네즈와 으깬 마늘, 파슬리가루가 범벅이 되어있다. 한입 먹으니 뜨끈한 감자 속이 부드럽게 으깨진다. 그 사이로 청량한 맥주를 부으니 신선도 부럽지 않았다.

Santa maria la blanca 성당, 12세기의 건축물이 건재하다.

잔뜩 행복에 취해있는데 젊은 순례자 커플이 품에 무언갈 소중히 담고는 우리 쪽으로 다가왔다. 아일랜드에서 온 신혼부부다. 순례길에 오른 지 이틀째던가 Zubiri에서 만났던 적 있다. 2층 침대에 위아래로 누워있던 폼이 틀로 짠 듯 똑같아 사진을 찍어주고는 '모르는 사람이 봐도 부부인걸 단박에 알겠다'고 한바탕 웃었던 기억. 자세히 보니 품 안에 작은 새끼고양이가 꼼질거린다. 아침에 길을 나섰고, 추위에 떨고 있는 새끼고양이를 발견했으며, 너무 작고 가냘파 데리고 왔고, 고양이를 데리고 오늘 저녁 아일랜드로 돌아간다고 했다. 귀를 의심해 재차 물었다. 순례길을 포기하고 아일랜드로 돌아간다고? 그리고 곧 그 물음을 후회했다. 저들의 결론 전엔 여러 갈래의 고민이 있었을까. 아니, 그건 내 생각이다. 선택지 따위 없었을 수도 있다. 길이야 다시 오면 그만이니까. 생명은 떠나가고 나면 돌아오지 않으니까. 그들을 이해하기 위해 내 머릿속에서 같은 갈래길을 만들어내고 양 축을 달아 시소를 태워보았다. 내 생각엔 무게가 없어 어느 한쪽으로도 기울게 만들 수 없었다.

기념, 환영, 축복, 추모 그 어디쯤에 있을 꽃다발

걸으며 계속되는 고민. 나였다면 어떻게 했을까. 품에 안고 카미노를 걸었을까. 아침에 길을 나섰다가 고양이를 발견한 사람이 나였다면. 나의 도움이 필요한 그 작은 생명을 달가워했을까. 아려오는 골치에 미간을 잡았을까. 두고 떠나야 했더라도 납득이 되었다. 그런 선택을 했다면 누군가 옳고 그름을 판단했을까?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각자의 길, 각자의 선택. 우린 모두 다른 의미의 길을 걷고 있다. 같은 길이지만 다른 길. 같은 시대를 살지만 다른 삶을 살듯이. 문득 학창 시절 별로 친하지 않았던 여자애가 생각났다. 학급에서 돈을 걷어 불우이웃을 돕자고 했던 그녀. 반대하는 목소리들을 경멸하던 눈빛. 바투 놓인 벽처럼 대치하던 그때의 분위기. 새초롬한 눈빛이 떠오르면서도 회상되는 그녀의 모습은 머리카락이 흘러내리는 뒷모습이다. 내가 살면서 옳다고 생각했던 것들은 정말 옳았을까, 또다시 걸으며 계속되는 고민.

오늘의 저녁은 삼겹살

멀지 않은 거리를 조금 더 걸어 알베르게에 도착해 먼저 도착한 수빈, 소영 씨와 장을 보러 나갔다. 이미 와서 한바탕 장을 보고 필요한 재료는 다 사놨다고 한다. 그럼 왜 왔냐고 물으니 날 위해서 와줬단다. 그 마음이 고마워서라도 빈 손으로 돌아갈 수는 없다. 저녁식사에 술이 빠지면 아쉽고, 디저트가 빠지면 또 섭하니 와인 한 병과 아이스크림, 생크림 슈를 샀다. 계란탕을 끓여보려는데 얕은 화력에 물이 노상 끓어오를 생각을 않는다. 순례길 위에선 기략이 자라나는 법. 계란찜으로 종목을 바꿔 남는 재료를 다 때려 넣고는 전자렌지를 돌려 만들어냈다. (계란탕이었던) 계란찜, 삼겹살, 양송이구이, 알리오올리오 파스타를 함께 나누어먹었다. 한국인의 밥상 별거 있나, 한국인들끼리 모여서 만들어먹으면 그게 한국인의 밥상이지.


Question 18. 꿈이 있다면?

고민을 할 겨를도 없이 '로또 당첨'이라고 적었다. 마음에 들지 않는다. 펜을 뒤로 잡고는 '로또 당첨'이라고 적은 공간 사이의 여백으로 톡, 톡 떨군다. 나중에 커서 무언가가 될 수도 있다는, 아니 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된 나이가 14살이었나. 꿈은 곧 장래희망이라고 생각하기 시작하던 때. 막 대학에 입학했을 때에는 약사가 되고 싶었다. 뭣보다 돈을 많이 벌 수 있다고 생각해서였으나 아무도 이유를 묻지 않았다. 그전엔 해외봉사자가 되고 싶었다. 누군가 왜냐고 물으면 세계 곳곳에 힘든 사람들을 도와주고 싶다고 말했다. 더 어릴 때 꿈이 뭐냐고 물으면 선생님이 되고 싶다고 말했다. 어른들이 왜냐고 물으면 선생님은 뭐든 아니까요, 하고 대답했다. 그보다 더 어릴 때 꿈은 하늘을 나는 거였다. 등에서 날개가 돋아나고, 깃털이 자라나고, 몸이 떠오르고, 절벽을 뛰어내리는데도 추락이 아닌, 그 밑에 깔린 바다를 활공하는 그런 꿈. 머리가 자라고 날 구성하는 세포 하나하나가 죽고 다시 탄생하는 동안 나와 함께 자라거나 같이 도태되거나 같이 늙었을 꿈들을 죽 나열해 놓고 '로또 당첨'과 비교해 본다. 빛바랜 다짐들과 애초부터 회색인 꿈을. 그리고 다시 적어본다. 여행을 하며 살기, 책을 쓰기, 식물을 키우기… 나의 눈으로부터 빛이 나는 일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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