뭐지, 원숭이띠인 우리 남편 생일에 갑자기 등장한 저돌적이기까지한 수상한 저 돼지의 정체는?(알고 보니 폭스바겐 엔진 장착한 야생 멧돼지더라는!!! 농담입니당.)
남편의 생일날이 되었다. 원래도 시끌벅적한 이벤트를 좋아하는 남편이긴 해도 자기 생일을 병원까지 와서 할 거란 생각은 못했다. 내 생일도 아니고. 그날 아침은 언니도 나도 아이도 남편의 생일을 까맣게 잊어버렸다는 게 함정이었다.그래도 내가 배우자의 촉으로 둘보다는 나았다. 서둘러 언니한테 톡을 보내자 아뿔싸, 내 병문안 준비를 마치고 벌써 집을 나왔다는 거다. 쓸데없이 그럴 때 동작은 또 빨라가지고. 우짜냐, 언니가 동생 성질 난 걸 직감하고 물었다. 우짜긴 우째, 씩씩거리며 자고 있는 애한테 오늘 파파 생일이야, 하고 급하게 톡을 보냈건만 그날 저녁까지 읽지도 않더라!자식 키워봐야..
일단 아침에 서프라이즈, 하고 깜짝 생일 축하하고 넘어가는 게 경험상 가장 간단한데, 지금은 덜 간단한 저녁 축하를 생각해야 했다. 우리 언니 역시 이런 일에는 타고난 재주가 없고, 우리 딸은 자기 친구들 생일 선물 준비하는 데는 온갖 안 타고난 재주까지 끌어다 쓰는 신통한 재주가 있더니만 파파 생일에 뭐 좀 해보라면 안 하겠지? 결론부터 말하자면 올해부터는 엄마 파파 생일에 카드도 안 쓰시더라는(남편한테만 받았다, 카드. 나는 병원 핑계 대고 안 썼지만.). 딸의 경우엔 나 사춘기거든요, 인상 잔뜩 안 쓰고 살포시 웃으며 등장하셔서 같이 사진이라도 박아주니 감사해야 하나.
우리가 준비한 남편 선물은 건 딱 두 개뿐. 언니가 독일 올 때 면세점에서 산 띠별 오르골과 우리 엄마가 사위에게 주신 용돈 봉투(우리 엄마는 딸과 사위와 손녀 생일에 꼭 10만원씩 용돈을 주신다). 아침에 서프라이즈! 하기엔 모자라지 않은데 저녁엔 작은 케이크에 초라도 켜야 구색이 맞을 것 같았다. 언니는 케이크 가게 위치를 모르고 딸은 시켜봐야 미덥지가 않고. 시누이한테 부탁해볼까? 설마 자기 남동생 생일에 오라는데 노 하지는 않겠지? 바바라 집 근처에 엄청 맛있는 조각 케이크 맛집이 있기 때문이다. 이런 날에 우리 언니한테 독일 조각 케이크 맛도 좀 보여주고. 이런 게 일석이조가 아닌가.
보나마나 남편의 솜씨라는 게 한 눈에 보이는 과일. 신기한 건 자기 생일날 데코를 자기가 준비하시면서도 신나게 한다는 거. 여튼 결론은 뭘 하는 걸 좋아해!
나는 언니를 저녁에 일찍 픽업해 가서 집에서 자기들끼리생일 파티를 하랬더니 남편은 시누이를 일찍 픽업해서 저녁 8시에 병원에 와서 자기 생일 파티를 하시겠단다. 1인실도 아닌데 굳이 병원에서 하시겠다는 그 심리를 이해하기 힘들지만 패스. 남편이 하는 일이라면 무조건 못마땅하고 보는 게 갱년기 아내의 정석이라서(갱년기가 다 지나고 안 지나고는 상관없다) 한 번 못마땅한 표시는 하고지나갔다. 못마땅하기는 시누이도 마찬가지. 콕 집어서 그 집 가서 맛있는 조각 케이크 네 조각을사 오라고 두 번을 왓츠앱으로 신신당부를 했건만 말을 안 듣더라(저녁 8시에 문을 닫는다나 어쩐다나. 그러니까 8시 전에 가서 사놔야지!!!).
시누이가 해맑은 모습으로 사 온 건 평소 내가 좋아하던 달팽이 모양을 한계피향 시너먼 쿠헨. 입을 다물지 못했다. 내 생일도 아닌데 굳이? 그것도 한눈에 어디서 산 줄도 알겠더라. 우리 동네 마녀 카페. 그래도 나름병원에 있는 나를 생각해서 그런 거니 일단 고맙게 생각하기로. 그렇게 우리 언니한테 맛있는 독일 조각 케이크를 맛 보여주려던 야심찬 계획은 물거품이 되고 말았지만. 그날 저녁엔 쿠헨을 한 입도 입에 안 대고 내 암세포들에게화풀이를대신했다.지금 생각하면 화를 낼 일도 없었는데 암세포들만 의문의 1패를 당한 거지. 드디어 대망의 선물을 공개할 시간! 그런데 그런데 그런데.. 아이가 집에서 오르골과 한국 할머니의 현금 봉투를 들고 오는 걸 깜빡하셨단다. 내 참!
결국 믿을 건 바바라가 준비한 선물뿐. 저 돼지 등에 봇짐처럼 꽁꽁 싸맨 게 선물이란다. 대체 뭐지? 모두가 궁금해하는 속에 남편이 펴고 펴고 또 펴서 속에 있는 걸 펴 보니 자동차 열쇠였다! 남편과 바바라는 환호성 속에 서로를 부둥켜안고 난리를 치고, 멋도 모르는 언니와 아이는 박수를 치고, 나는 한숨만 한 번 내쉬고 지켜만 보았더랬다. 사실은 이랬다. 우리는 30년도 다 된 돌아가신 친시아버지의 폭스바겐을 아직도 공동 사용하고 있다.원래 당연히 열쇠는 두 개였는데 그사이 남편이 하나를 잊어버린 거라. 그런데 키를 새로 하나 장만하기 비싸다고 그동안 키 하나로 버텼으니 얼마나 불편했겠나. 열쇠점에 가면 크게비싸지도 않더만. 이번에 바바라에게 확인하니 160€인가 180€인가 그랬다(그새 까먹은 난 또 뭐냐! 폭스바겐 서비스 센터에서 진품을 구하려면 진짜 진짜 비싸다고.말이라고..)
각설하고, 하이라이트는 30분 후 돌아갈 때 남편이 아이에게 받은 곰돌이 생일 선물을 내 품에 꼭 안기며 1주일 동안 리스한다고 했을 때였다. 오홋, 선물도 리스가 되는 거였어! 오호라, 그렇다면...!!! 나는 아이에게 당당하게 소리치며 말했다. "알리시아, 집에 가면 파피 선물 두 개 있잖아, 오르골과 할머니 돈 봉투. 그것도 엄마한테 1주일 리스한다고 파피한테 말해. 단, 1주일 후에는 곰돌이만 돌아갈 수 있다는 가능성도 미리 말해주고!" 모든 리스에는 리스크가 성에처럼 껴있는 법이라서, 호호.
요건 내가 주문한 게 아닌데, 에휴~! 한 눈에 딱 봐도 어디서 산 줄 알겠더라. 그래도 성질 잘 죽이고 한 숟갈도 안 먹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