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스피스에 데이 프로그램이란 게 있다. 호스피스에서 운영하는 프로그램으로 보통 중증 암환자들이 참가한다. 예를 들면 나처럼 휠체어를 탄 암환자라든가 보행에는 지장이 없지만 중증 암환자라든가. 왜 가냐고? 왜 가겠나, 심심하니까. 나 빼고는 오시는 분들의 평균 연령이 높은데나만 외국인에다 젊은 편이다. 솔직히 나는 남편이 원해서 간다. 1주일에 하루 정도는 이런 데라도 가주기를바라는 것 같아서. 매일 침대에 누워있는 와이프를 보는 심정도 이해해 줘야지(뭐, 처음에는 이렇게 비장하게 생각했는데 하루이틀 누워있다 보니 누운 자나 보는 자나 슬슬 익숙해지기는 매한가지인 듯).남편은또 다르게 생각할 수 있다. 이런 데라도 가서 강제로라도 사람을 만나고 하는 게 내 정신 건강에 이롭다고믿을 수 있다는 거지. 그게 맞을 수도 있고.
나는 내심1주일에 한 번만 가는 게 어딘가, 안도하며가고 있다. 원래데이 프로그램이 화/금 주 2회인데, 금요일에는 집으로 와주는 림프 마사지와 일정이 겹쳐서 다행히 하루만 가도 괜찮게 되었다(남편은 처음에 주 이틀을 생각하는 것 같았다. 금요일은 안 된다고 빼박인 림프 카드를 내밀었더니 얼굴에 실망의 그림자가 번개처럼 지나갔다). 그나저나 호스피스 데이 프로그램에 몇 번 가다 보니 이제는 나도 적응이 되긴 했는데, 처음에는 종일 독일어를 하는 게 스트레스가 되지 아닐까 걱정을 많이 했었다. 그런데 생각보다는 스트레스가 없다. 점심때인 12시쯤 도착해서 점심을 먹고, 이야기를 나누다가 보드 게임도 하고, 오후 3시쯤 쿠헨과 카페가 나오는 티 타임을 하고, 오후 4시쯤 호스피스를 출발해서 5시쯤 집으로 온다. 참가비는 1인당 10유로다.
오갈 때는 대중교통을 이용한다. 첫날에는 우반으로 갔다가 지금은 버스를 탄다. 한 번만 탈 수 있는 편한 노선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독일에서는 버스에 휠체어가 타고 내릴 때 운전사가 내려서 도와준다. 도와준다는 의미는 운전사가 승객이 타고 내리는 문 쪽에 깔린 보조 발판을 내려준다는 뜻이다. 나는 남편과 같이 다녀서 남편이 버스문과버스 승강장에 단차가 있어도 휠체어의 앞뒤를 쉽게 들었다 올렸다 해서 운전사의 도움을 따로 받지는 않는다.휠체어를 타고 버스를 타는 게 처음에는 어색하기도 하고, 그러다 보니 멀미가 나려고 한 적도 있었는데, 이것도 적응이 되고 있다. 적응이 되려고 된 건 아니고 아무 생각 없이 하다 보니 그렇게 되었다.
길가로 난 정원의 꽃들을 보는 재미도 크다.
금요일 데이 프로그램엔 안 가봐서 모르겠는데(조만간 여기도 한번 진출해 보려고 한다) 화요일엔 오는 사람이 적다. 나 포함 4-5명의 환자와 4-5명의 자원 봉사자들이 전부다. 호스피스에서 데이 프로그램을 왜 할까 궁금해서 곰곰이 생각해 본 적이 있는데(이게 다 누워서 할 일은 없고 시간은 많아서 나올 수 있는 데이터다) 내가 가는 이 호스피스는 기부금을 받아서 운영되고 있다고 한다. 정부 지원도 받겠지. 환자들의 자가 부담이 적다고 하는 걸 보면. 데이 프로그램에 왔던 환자나 그들의 가족과 지인들 중에 이 호스피스를 이용할 환자를 위한 홍보용 프로그램이 아닐까 싶다. 왜 꼭 그래야 하나, 호스피스에들어올 환자들은 차고 넘칠 텐데,라고 반문하신다면 딱히 할 만한 대답은 없다만.
이 호스피스를 알게 된 건 우리 아이의 친구인 한나 할머니를 통해서였다. 어떻게 내 얘기가 한나 엄마 아빠를 통해서 한나 할머니 귀에까지 들어갔겠지. 한나 할머니가 예전에 이 호스피스에서 자원봉사를 하셨던 모양이다. 그때는 내 상태가 아주 안 좋았어서 호스피스에 가나 마나까지 고민했었다. 한나 할머니가 데이 프로그램에 대해 알려주시고, 언니가 떠난 후에는 남편과 나와 함께 가주신다. 남편은 오갈 때 버스 탑승만 동행해 주고 오후 내내 나와 호스피스에 함께 남아 주시는 건 한나 할머니시다. 처음에는 말수가 적고 약간 진지해 보이셔서 나 역시도 말을 아꼈는데 웬걸 요즘엔 말씀도 잘하시고 자주 웃으시는 걸 보고 나도 마음을 놓고 편하게 대하고 있다. 아침부터 우리 집에 오셔서 오후 늦게 돌아올 때까지 나를 위해 화요일 하루를 온전히 빼주고 계시다.
이번 주엔 호스피스에 갔다가 점심을 먹자마자 식곤증이 몰려와 죽을 뻔했다. 큰 테이블에 둘러앉아 함께 이야기를 나누는데 자꾸 눈이 감기는 거였다. 다행히 내 맞은편에 있던 평소 센스 있다고 여기던 호스피스 스텝 프라우 뮐마우어 씨가 내 혼돈의 상태를 짐작한 듯 갑자기 내 이름을 부르며 아템 테라피를 받으러 가라는 게 아닌가. 일명 호흡 마사지. 받으면 넘 좋지! 첫날 우리 언니랑 둘이서 받는 영광을 누렸다. 휠체어에 앉은 채로 받았는데도 좋았다. 별 건 없다. 눈을 감고 테라피스트가 내 몸에 손을 대면 그곳에 집중하며 호흡만 하면 끝. 난 호흡 하나는 잘해서 완전 이완을 할 수 있었다. 개운했다. 테라피를 마치자 잠이 싹 달아났다. 귀한 테라피를 두 번씩이나 받는 행운을 얻다니!
졸음을 이겨보려고 주는 에스프레소도 마다하지 않았건만..
언니 대신 나를 돌봐주는 친구 M과도 잘 지내고 있다. 언니 떠나고 보름도 안 돼서 내가 좋은 컨디션으로 회복한 건 다 내 친구 M 덕분이다. 이 친구가 한없이 밝다. 가장 좋은 배우자는 밝은 성격의 배우자라는 말이 있잖은가. 물론 그 밝은 성격도 상대에 따라 어떻게 변할지 모른다는 게 함정이긴 하지만. 그런데 나는 내 친구의 밝은 덕을 많이 본 사람 중 하나다. 친구와 아침부터 서로 얼굴이 좋아 보인다는 둥 맑고 고운 덕담을 나누고 하루를 시작해 보시라. 친구와 농담을 주거니 받거니 하며 점심을 먹어 보신 분은 잘 알 것이다. 하루가 즐겁고 한 주가 즐겁다.
오늘 저녁엔 브런치에 글을 올릴 때가 됐는데 하며 올리나 마나 고심을 했다(요즘엔 글을 쓰는 쪽보다 안 쓰는 쪽으로 더 저울이 기울어진 탓으로). 대충 근황이라도 알려야지 싶어 호스피스 쪽으로 가닥을 잡고 신나게 달리고 있는데 갑자기 문 쪽에 흰 가라테 도복을 입고 검은 머리를 풀어헤친 한국 귀신과 흡사한 뭐가 나타나는 게 아닌가. 자세히 보니 우리 딸. 두 눈에서는 눈물이 줄줄. 이게 무슨 일인가 싶어 아이의 두 손을 잡고 이유를 물으니 뜬금없이 한다는 말이 이랬다.
"댓글들이 너무 슬퍼!"
엥, 이건 또 무슨 소리인가, 싶다가 내 글에 달린 댓글들을 두고 하는 말이란 걸 알았다. 친구들과 노느라 자나깨나 바쁘신 분이 엄마 글에 달린 댓글은 왜 읽으셨는지. 거기 슬픈 댓글이 뭐가 있다고. 다시 브런치로 컴백해 주어서 '반갑'고 '고맙'다, 말고 뭐가 또 있다고. 그렇게 말하며 따듯한 오른손을 들어 차가워진 뺨의 눈물을 닦아주자 그제야 배시시 웃는다. 그건 그래, 하면서. 그러니 너무 슬픈 댓글은 달지 마시기를. 슬픔의 기준은 만 14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