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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발짝 Sep 17. 2023

[여행 자국] 파도에 몸을 맡겨봐도 괜찮을까

2023.08.30 ~ 09.10 적도 너머에서 배운 것 1

호주 여행을 다녀왔다. 정말 오랜만의 긴 여행, 처음으로 가 본 남반구에서 보낸 시간으로 나는 또 한 발짝 나아갔다.


여행의 묘미는 역시 계획하지 않은 일에서 나온다. 설령 그게 반갑기만 하진 않더라도. 분단위의 계획을 짜갔던 스무 살 도쿄여행의 마지막 날 우연히 발견한 식당의 분위기를 잊지 못한 나는 여행에서 계획을 점점 줄여갔다. 이번 호주 여행에서도 뜻하지 않은 일들이 참 많이 벌어졌다.


나는 시드니에서 In-Out을 했는데, 시드니-골드코스트, 브리즈번-케언즈, 케언즈-시드니, 세 번의 국내선 비행이 있었다. 국내선을 너무 얕봤던 걸까. 골드코스트로 가는 새벽 비행기를 타던 날, 우리 둘은 온라인 체크인도 안 한 채로 30분 전, 공항에 도착했다.


체크인 수속은 이미 끝났으니 서비스 데스크로 가라는데 마음이 급한 우리와 달리 민원을 처리하고 있는 사람들은 너무나도 여유롭다. 타야 할 비행기의 문이 닫힌 후에야 우리 차례가 다가왔고, 75불을 더 지불하며 탈 수 있는 가장 빠른 비행기는 6시간 후.. 서퍼스 파라다이스에서의 서핑 강습을 예약해 놓았는데, 유일한 일정이 깔끔하게 날아가 버린 것이다.

공항 밖으로 나와서 찍은 하늘. 전 날 뜬 슈퍼 블루문이 지고 있었다.

우버가 잡히지 않아 택시를 비싸게 타고 온 터인지, Central로 돌아갈 엄두를 내지 못한 우리는 친구가 봐뒀던 근처 미트 파이 가게로 향했다. 넓게 펼쳐진 길에 놓여있는 파이 가게는 산속의 오두막처럼 우리를 반겼고 오픈 직후라 갓 구운 파이는 따뜻했다.

우리가 쓴 바보 비용이 대극장 뮤지컬 표 값 정도인데 2층에 이발소가 있는 런던의 파이 가게 대신 진짜 미트 파이를 먹고 있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따위의 친구와 나눈 농담도 즐거웠다.

아직 진열대에 올라가지도 않은 파이들, 맛있었다.

한창 수다를 떨며 허기를 채우고 났는데도 몇 시간이 남아 있었다. Mascot이라는 주변 시내를 구경했고, 커다란 창고의 골동품 점에서 중세 시대의 물건들을 발견하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평소였으면 못하게 된 서핑 강습과 적지 않은 금액의 바보 비용에 우울했을지라도, 한 번의 실수로 소중한 여행의 기분을 망쳐버릴 순 없었다! 비록 서핑은 못했지만 맛있고 저렴한 파이들과 접하기 어려운 골동품들을 발견했지 않은가?

기회를 놓치고 계획을 실패했다는 마음보단,
다른 경험에 대한 감사와 다음부턴 미리 움직이겠다는 다짐을 얻은 시간이었다.
결국 도착한 서퍼스 파라다이스 비치. '파도가 예쁘다'는 말 그대로였다.

오후 늦게 도착한 골드코스트. 수영복을 갖고 온 김에 물놀이라도 하기로 했다. 밀려오는 파도에 몸을 실어보며 물살을 즐겼다. 서핑을 못했다는 아쉬움은 이미 저 멀리 날아간 지 오래였다. 그래, 이렇게 그냥 맡겨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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