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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발짝 Oct 06. 2024

[문화 자국] 객석에서 마주한 나

나의 거울이 된 뮤지컬, <디아길레프>와 <시데레우스>

대학로의 많은 공연 제작사는 한 작품을 몇 개월 공연하고 나서 다시 공연하는 레퍼토리 시스템을 운영한다. 그래서 좋아하는 작품이 다시 돌아올 때까지 몇 년을 기다리기도 한다. 시간이 지나서 다시 만난 작품은 조금씩 달라져 있기도 하고 출연 배우가 바뀌기도 하는데, 사실 가장 많이 변한 건 관객인 나 자신이다.


공연을 보면서 우리는 인물이나 상황에 동화되기도 하고 그들의 감정에 공감하기도 한다. 셰익스피어가 햄릿의 대사를 빌려 연극은 시대의 거울이자 삶의 모방이며 진실의 표상이라고했듯, 나는 연극이라는 거울을 통해 나 자신을 돌아보곤 했고, 아래 두 작품이 특히 그러했다.


무대를 사랑했던, 디아길레프

디아길레프는 발레뤼스라는 발레 제작사를 이끈 사람이다. 뮤지컬 <디아길레프>는 그가 디자이너 브누아, 작곡가 스트라빈스키, 발레리노 니진스키와 함께 발레뤼스를 만들어 가는 이야기를 다룬다.
2022 디아길레프 - 그리지 못하는 건 없어 中 (쇼플레이 유튜브)

초연이 올라왔던 22년 봄 초연, 나는 막 창업에 도전해 스타트업 씬에 발을 들였고, 동아리 공연을 위해 서울과 포항을 오가며 지내던 시기였다. 무대 위 발레뤼스의 탄생과 도전은 내가 몸담으려는 스타트업과 닮아 있었고, 발레에 인생을 바친 디아길레프는 연극에 빠져 있던 나와 너무 닮아 있었다. 그래서 발레뤼스의 사람들이 멋져 보였고, 발레를 좇다 혼자가 된 디아길레프가 안타까웠다. 


1년 넘게 준비한 공연을 해내겠다며힘에 부치는 일정에 애쓰던 나는, “발레를 사랑한 대가로 수많은 이별을 하고 매일 밤 외로워야 한대도 상관없어”라는 디아길레프의 회고가 아프게 다가왔다. 그때의 힘들고 어려운 상황들이 연극을 사랑하기 때문에 감내해야하는 대가로 느껴졌기 때문이다.



2024 디아길레프 - 가장 사랑하는 中 (쇼플레이 유튜브)

2년이 지나 올해 봄, 다시 만난 디아길레프는 처음과 조금 다르게 다가왔다. 그동안 나는 대학을 졸업하고, 낮에는 스타트업에서 AI 엔지니어로 일하고, 밤에는 연극 단체에서 정기공연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발레뤼스와 디아길레프를 보며 느낀 감정은 그대로였지만 그 속에 담긴 의미가 달라졌다. 


마냥 스타트업과 비슷하다고 상상하고 함께 신났던 발레뤼스의 장면들에서 나는 팀원들과 제품을 기획하고 논의하던 경험들을 떠올렸고, 신나던 그때를 회상했다.


연극을 대하는 마음도 달라졌다. 연극을 사랑하는 마음은 더 커졌지만, 디아길레프의 회고가 아프게만 느껴지지는 않았다. "내가 사랑하는 것들이 사랑 받을 수 있다면 그걸로 충분"하다는 그 뒤의 가사가 더 크게 다가왔다. '그래, 내가 애써 만든 작품으로 누군가가 행복해질 수 있다면 괜찮다'는 생각을 하며 말이다.

그렇게 디아길레프가 돌아오기까지 2년 동안 나는 스타트업 씬에 들어가고 싶은 사람에서 한 스타트업의 일원이 되었고, 연극은 내 일부가 되어 있었다. 


과학과 신념, 시데레우스

갈릴레오와 케플러의 지동설 연구 과정을 이야기하는 시데레우스는 내가 초연을 제외하고 지금까지 세 시즌 동안 함께한 작품이다. 세 번째 시즌을 본 지금, 나는 과학고를 갓 졸업하고 처음 이 작품을 접했을 때보다 갈릴레오에게 더 가까워진 느낌이다. 

2020 시데레우스 - 살아나 中 (컴퍼니랑 유튜브)

위의 사진 속 장면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장면 중 하나이다. 성인이 된 지도 한참 되었을 케플러와 갈릴레오는 연구할 때만큼은 아이처럼 순수했다. 아이같은 호기심과 빛나는 눈빛이 부러웠다. 연구를 하고 싶어서 대학에 갔던 스물 한 살의 나는, 나도 정말로 무언가를 탐구하고 사랑한 적이 있는가, 내가 과연 어느 것에 저들처럼 몰두할 수 있을까 반성하기도 했다.


2년 후 두 번째 시즌을 보았을 때 나는 스타트업에서 AI 모델을 다루고 있었다. 비록 연구보다는 엔지니어링에 가까운 일이었지만, 무대 위의 케플러와 갈릴레오처럼 나도 내가 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연구하는 그들을 보며 함께 신이 났다. 


2020 시데레우스 - 난 떠나 中 (컴퍼니랑 유튜브)

올해 다시 본 시데레우스는 조금 다르게 다가왔다. 이번엔 그들의 연구뿐만 아니라 그들이 가진 신념이 더 뚜렷하게 보였다. 성경과 다를지라도 자신들이 발견한 진실을 세상에 밝히고자 했던 갈릴레오와 케플러의 결심이 선명하게 느껴졌다. “잘 봐. 저기 우리가 본 것들이 있어, 그대로 다 있다고! 어떻게 저걸 거짓이라고 말해, 어떻게 저걸 두고 떠나“라는 갈릴레오의 대사가, 자신이 본 진실을 부정당했을 때의 절망감이 아프게 다가왔다. 그러고 생각했다. 내가 세상을 바라보는 태도, 진실을 마주하는 방식이 달라졌구나.


그동안의 삶 속에서 옳다고 믿는 것을 지켜내고자 하는 의지와 용기가 조금씩 자라났음을 자각했다. 갈릴레오와 케플러처럼 나 역시 내가 믿는 진실을 당당히 주장할 수 있는 힘을 갖게 되었음을 느낄 수 있었다. 그동안의 경험들이 나를 서서히 변화시켰고, 객석에서 마음이 저릿했던 그 순간을 통해 나는 더 단단해졌음을 확실히 인식했다.


공연을 통해 나를 보다

이렇게 객석에 앉아 무대에 비친 나를 보기도 하고, 매 시즌 다시 만나는 작품을 통해 내가 어디로 나아가는지 엿보기도 한다. 공연을 보는 동안 나는 때로는 인물에 동화되고, 그들에게 감동받으며, 결국 나 자신을 발견한다. 무대는 내가 스스로에게 던지는 질문을 비추는 거울이 되었고, 작품 속에서 나의 고민과 성장을 확인할 수 있는 장이었다.


앞으로 또 어떤 무대를 마주하게 될지, 그리고 그 무대 위에서 어떤 새로운 나를 만나게 될까. 그때도 나는 여전히 객석에서 무대 위의 이야기를 통해 나의 이야기를 찾아 나가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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