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학교 다닐 때 영어 잘했는데. 토익도 만점 받았고. 나도 번역이나 해 볼까?”
“외국어만 잘하면 아무나 번역할 수 있는 거 아냐?”
“일본어 자격증 있는데 부업으로 번역할 수 있나요?”
아마 이것들이 번역가들이 가장 듣기 싫어하는 질문 원, 투, 쓰리일 것이다.
실제로 번역에 대해 문외한인 사람들뿐만 아니라 번역에 제법 관심이 있다며 번역계를 기웃거리는 지망생들 중에도 이런 질문을 하는 사람들이 심심찮게 있다.
때문에 예비 번역가와 현역 번역가들이 활동하는 인터넷 카페에 누군가 이런 질문을 올리면 성질이 바짝 난 번역가들이 날카로운 이를 잔뜩 드러내며 일침을 가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번역가는 영어 말고 갖춰야 할 자질이 다양합니다.”
“외국어를 잘한다고 아무나 번역가가 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번역을 단순히 돈이나 더 벌 수 있는 부업의 개념으로 보시면 곤란합니다. 돈 벌고 싶으면 다른 일을 하시는 게 낫습니다.”
성격이 허허실실인 나는 가끔 그런 질문들을 봐도 ‘그래, 그런 게 궁금할 수도 있지.’라고 생각하는 편이지만 날을 세우는 번역가들의 반응도 이해가 된다. 누구든 내가 공들여 하는 일을 쉽게 보는 걸 좋아할 사람은 없으니까. 또한 누군가에게는 돈에 상관없이 스스로 좋아서 사명감을 갖고 하는 일인데 다른 누군가에게는 한낱 돈벌이 수단 정도로 가볍게 치부되는 것이 싫어서일 수도 있다.
사실 “어떻게 번역가가 됐어요?”라고 물어보면 번역가들의 대답은 정말 각양각색이다.
“외고 나오고, 대학이랑 대학원에서도 영어 통번역 전공해서 번역하게 됐어요.”
“자동차 디자인 전공했는데 외국으로 유학 갈 준비하다 누가 문서 번역 좀 해 달라고 부탁해서 처음 시작했어요.”
“출판사에 아는 편집자가 있는데 번역 한번 해 보겠냐고 하기에 얼렁뚱땅 하게 됐어요.”
“어려서부터 일본 추리 소설 좋아하다 보니까 혼자 공부해서 취미로 번역을 하다가 자연스럽게 직업이 됐어요.”
“성격이 조용해서 사람들이랑 부딪치지 않는 일을 하고 싶었는데 마침 영어를 잘해서 번역을 하게 됐어요.”
“직장에서 외국으로 오가는 서류를 자주 번역했는데 생각보다 재미있어서 시작했어요.”
“장국영 오빠를 좋아해서 홍콩 영화를 좋아하다 보니 어학연수까지 갔는데 번역 에이전시 잠깐 취직한 덕에 진짜 우연히 중국어 번역을 하게 됐어요.”
번역가라고 하면 원래부터 외국어를 전공하거나 번역가가 꿈이었을 것이라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처음부터 번역가를 목표로 외국어를 공부하고 번역의 기술을 익힌 사람들이 절반이라면 꿈을 꾼 적이 없음에도 아주 우연히 번역의 길에 들어선 사람들도 절반은 된다. 나 역시 후자의 경우로 처음 번역을 시작할 때는 “전공자도 아니고, 나 같은 사람이 번역을 해도 되나?” 라는 고민을 많이 했었다. 실제로 전공자 출신이 아닌 번역가들은 대부분 이런 고민을 한 번쯤 해 봤을 것이다.
그러나 전공자든 아니든 번역가가 된 사람들을 찬찬히 살펴보면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그것은 바로 책과 글을 좋아한다는 사실이다. 이를테면 번역가 생활을 하면서 알게 된 번역가들 중에 책 읽기와 글쓰기를 싫어한다는 번역가는 단 한 명도 본 적이 없다. 물론 그들이 모두 엄청난 독서광이라든지 뛰어난 작가란 말은 아니다.
다만 번역을 업으로 삼고 있는 사람들은 그 이전부터 기본적으로 책을 즐겨 보고, 사소하더라도 글쓰기를 좋아했다는 뜻이다. 다시 말해 책을 꼼꼼히 읽고 좋은 문장력으로 글을 옮기는 것이 번역가의 필수적인 자질이라 하겠다. 그래서인지 경력이 쌓인 번역가 중에는 직접 글을 써서 작가가 되는 경우도 종종 있다. 이는 번역가 본인이 가진 필력도 나쁘지 않지만 좋은 책들을 번역하며 나도 모르게 차근차근 쌓아 온 지식과 지혜가 시간이 지나며 빛을 발하게 됐다는 뜻일 수 있다.
그런데 이렇게 좋은 책들이 번역가의 실력을 키워 주는 것처럼 지난 세월의 경험이 번역가에게 보탬이 되는 일도 흔히 있다. 내가 활동하는 번역가 카페에는 나이가 일흔 살이 넘은 번역가님이 계시는데 젊어서는 통역 장교로, 그 뒤에는 대기업에서 수십 년을 근무하다 은퇴하신 다음 일본 지사에서 오래 일했던 경험을 살려 번역을 시작하셨다고 한다.
그분의 번역가 데뷔가 10년쯤 됐으니 환갑이 넘도록 다른 일을 하다 어느 날 갑자기 번역가로 변신한 것이나 다름없다. 카페에서 글을 통해 가끔 소통할 뿐 개인적으로 아는 사이는 아니지만 가끔 올라오는 그분의 새 책 소식을 볼 때마다 배울 점이 많다는 생각을 한다. 그분이 번역하는 책들은 주로 음식과 척추 건강, 고혈압 등 건강과 관련된 것들인데 다분히 본인의 나이와 관심사가 반영된 결과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번역계에는 이렇게 늦은 나이에 데뷔해 왕성하게 번역 활동을 이어가는 번역가들이 적지 않다.
“뭔가를 새로 시도하기에 스물다섯 살은 너무 늦지 않아?”
“새로운 일을 하기에 서른은 너무 많지 않나?”
“서른다섯 살이면 벌써 삶의 안정감을 찾아야 할 때 아닐까?”
“마흔 살에 원하는 걸 시작하겠다고 하면 남들이 미쳤다고 하지 않을까?”
어려서부터 회색 안경을 끼고 인생을 보는 편이었던 나는 늘 ‘너무 늦었다’라는 말을 입버릇처럼 달고 살았었다. 간혹 좋아하는 것에 꽂히면 후퇴가 없는 직진이었기에 다행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항상 늦었다고 울며 보채는 어른아이가 됐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다른 일은 많이 겪어 보지 않아 잘 모르겠지만 번역에 있어서만큼은 경험이 매우 큰 자산이 된다. 이를테면 평탄한 인생을 살며 20대 초반에 데뷔한 번역가보다 인생의 우여곡절을 겪으며 50대에 데뷔한 번역가가 더 깊이 있는 번역을 선보일 가능성이 높다고 해야 하나.
특히나 어떤 특정 분야에 경험치가 높은 번역가일수록 그 분야의 번역에서 뛰어난 실력을 드러내게 마련이다. 뿐만 아니라 다양한 분야에서 많은 경험을 쌓은 번역가는 그만큼 여러 장르의 번역을 감당할 수 있다. 이는 그만큼 책이란 것이 오랜 세월 선대가 물려 준 지혜와 여러 학자의 연구, 통찰력 있는 작가의 감성이 서로 어울려 만들어진 결과물이기 때문이다. 또한 책 한 권에는 또 다른 여러 책들의 지식이 녹아있게 마련이다. 그렇기에 경험이 많아 다방면으로 이해하고 작가의 의도를 쉽게 알아차릴 수 있는 번역가가 번역 작업에 유리할 수밖에 없다.
“스물세 살 중문과 학생으로 대학 졸업을 코앞에 두고 있는데 아직 번역가로 데뷔하지 못해서 불안해요. 어떻게 해야 일감을 얻을 수 있을까요?”
“스물다섯 살 번역과 대학원생인데 원하는 책의 샘플 번역에서 떨어졌어요. 나이가 적지 않은데 이대로 괜찮을까요?”
번역가 카페에는 이런 고민들로 심각하게 머리를 싸맨 예비 번역가들의 글이 자주 올라온다. 그런 글을 볼 때면 뒤늦게 데뷔해 나름 오래 버티고 있는 번역가로서의 경험담을 함께 나누곤 한다.
“경력이 없는 초보에게 데뷔는 힘든 일이지만 버티다 보면 기회가 올 거에다. 그런 기회가 왔을 때 중요한 건 실력을 갖추고 있는 거랍니다. 그리고, 그런 실력을 갖추려면 많이 보고 쓰면서 다양한 경험을 쌓아 두는 게 중요하고요.”
번역가는 다 비슷하지만, 그중에서도 출판 번역가는 만만하게 보고 시작할 수 있는 일도, 어렵게만 보며 물러날 일도 아니다. ‘나도 번역이나?’라고 생각하며 쉽게 뛰어들 일도, ‘내가 번역을?’이라고 생각하며 괜히 주춤할 일도 아니라고나 할까. 대신 평소에 책 읽기를 좋아하고 글쓰기를 즐긴다면 여유를 갖고 느긋하게 도전해 볼만 한 일이라 하겠다.
하고 싶다는 마음이 있다면 결국 중요한 건 시작이 아니라 버티는 거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