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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엘리스 Feb 29. 2024

회화과의 법대생

한 손에는 법전, 다른 한 손에는 캔버스를 들고 다녔던 시절

대학교 2 학년 때, 나는 내가 좋아하는 것을 공부하고 싶었다. 일단은 그림 그리는 것을 좋아하니 회화과 전공 수업을 들어보자였던 걸로 기억한다. 이제는 십 년이 넘어 기억이 가물가물 하지만, 기억이 나는 수업이 두 개가 있다. 첫 번째는 누드를 유화로 그리는 수업과, 두 번째는 드로잉 수업으로 나의 그림 세계를 발전시켜 주었던 수업이 있었다.


첫 번째, 태어나서 처음으로 유화를 그려봤고, 또 한 학기 동안 다양한 인체의 그리면서 사람의 인체를 그 자체로 보게 되었다. 누드는 첫날에는 당황스러웠지만, 계속 그리다 보니, 다양한 인체와 포즈에서 보이는 선과 면을 연습하는 좋은 시간이었다. 유화는 처음에 색을 좀 잘 못 칠해도, 나중에 다시 덧칠할 수 있다는 점과, 색과 색이 캔버스에서 섞이는 게 재미있었다. 


두 번째 수업은 각자 주제를 정해서 그림을 한 학기 동안 꾸준히 그리는 수업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나는 처음에는 사람들의 초상화를 연필로만 그리다가, 그 당시 그 수업을 하신 강사님의 조언으로 여러 가지 색을 써 보게 되었고, 파스텔을 쓰는데 재미를 붙였다. 이때 나만의 스타일을 찾았던 거 같다. 나중에는 첫 번째 유화 수업에서도 다양한 색들을 썼던 걸로 기억한다. 지금은 취미로 그림을 가끔 그리지만, 그때의 내가 즐겨했던 방식으로 색이나 재료표현을 하고 있다.


지금도 소장하고 있는, 누드 유화 시간에 그렸던 그림

내 20대를 되돌아보면, 이 시절이 나에게는 많은 의미 깊은 시간이었다. 

대학에 들어가기 전까지는, 타인의 기준에 의해, 늘 해내야 된다는 압박감이 있었다. 회화과 수업을 들을 때면, 전공생들은 당연히 나보다 실력이 뛰어나기 때문에, 못해도 괜찮다, 시도해 보자 이런 생각이 주를 이루었다. 또한, 자신이 만든 미술작품에 대해서, 앞에서 발표하고 질문에 답변을 하다 보면서, 학창 시절에는 하지 못했던, 나는 누구인가, 왜 이것을 창 착하고 표현하고 싶은가 생각하게 한 시간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회화과의 수업에서 그림을 배우는 것뿐만이 아니라, 나를 탐구하는 시간을 가졌다. 


회화과라는 다른 세계에 들어가서 이방인으로 새로운 걸 경험한 경험이, 그 후에 한국을 떠나 이방인으로 이곳저곳에서 일하거나 살 때도, 스스럼없이 새 시작을 늘 할 때 도움이 되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이제야 든다. 


타과생이라고 텃세를 부릴 수도 있었을 텐데, 그런 거 없이 묵묵히 받아주셨던 전공생분들께 감사하고, 타과생임에도 불구하고 진지하게 가르침을 주셨던 교수님들과 강사님들께 감사하는 마음이다.


지금도 가지고 있는 그림들... 파스텔을 많이 사용했었다.

나름의 소소한 일화도 기억에 남는다. 수업 후에, 그림을 마땅히 그리거나 둘 공간이 없어서 동아리 방에서 그림을 그렸고, 수업 끝나고 수학 과외 알바를 하러 가는데 미술 용품을 들고 다녀서 학부모님께서 궁금해하시며 이유를 물어보시기도 했다. 집에서는 부모님께서 처음에는 내가 미술 용품을 들고 다니는 걸 보고, 교양 수업쯤으로 수업을 듣는다고 생각하셨다. 그 대학 법학과 갈 때, 미대로 설마 전과하겠어, 생각하셨던 부모님은 그때까지 설마가 사람 잡을 줄은 모르고 계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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