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동환 Dec 02. 2023

싶지만 싶지 않은

고선경 - 우리는 목이 마르고 등이 자주 젖지

옥상의 페인트 빛깔이 어둠에 섞일 때

어떤 믿음은 난간 같았어


야경이라는 건

어둠이 밀려날 수 있는 데까지를 말하는 걸까

이 도시는 사람들의 소원으로 빼곡해


아무도 없는 곳으로 놀러 가자

내 손바닥에 밴 아오리사과 향기

그러나 압정을 한 움큼씩 쥐고 있는 기분


우리는 목이 마르고 등이 자주 젖지


리듬을 이해하지 않으면서

리듬에 대해 얘기했어


등이 젖은 사람을 따라 걷다가

저마다 웅덩이가 있구나

퐁당퐁당 생각했어


아무것도 훼손하지 않으면서 훼손되지 않고 싶다


너와 손을 맞잡고 싶지만

내 손 안의 압정을 함께 견디고 싶지는 않다


깊은 바다로 다이빙하는 것과

작은 물웅덩이로 다이빙하는 것

어느 쪽이 더 위험한지


그딴 건 모르겠고 물수제비나 뜨자

나는 요령이 없어


내려다본 골목에 채소를 가득 실은 푸른 트럭이 서 있다

누군가가 몰래 무 하나를 훔쳐간다

희고 싱싱해서 그냥 먹어도 맛있을 것 같다


방수가 잘되는 페인트를 엎지르고서

우리는 온몸이 젖고 있다


가루 봄 들판


아스팔트 위에 가루가 뿌려져 있었다

저번달에 만든 눈사람에게서 전화가 왔다

봄은 다가오지도 않는데

청록색 수풀이 두렵다고 했다


나의 낙엽은 너의 등장인데

너는 나무가 앙상해지면 함께 비틀어져갔다

바람은 불지도 않는데

별도 함께 흔들려 갔다


너는 그 말을 남기고 갔다

어디로 갔는지는 모르고

왜 갔는지는 안다

어떻게 갔는지는 모르고


나는 바다에 빠지고 싶다던 너의 말을 음미했다

그러려면 두꺼운 옷을 입어야 할 텐데 했는데

물에 젖으면 빠져나오질 못할 것이라며

깊어질수록 바닷물이 더 집요하게 옷을 삼킬 것이라며


산으로 갔는지 바다로 갔는지 모르고

하늘은 아닌 것만 같고

파랑은 죽으라면 죽을 것 같고

봄이 되어갔는지를 모른다


널 냉동창고에서라도 살게 하고 싶었다

그곳에서라도 나는 얼어붙더라도

너는 살아서 날 녹여주라 하고 싶었고

강판이 날 깨뜨리지 않게 기대게 해 주고


결국 전기가 끊어져 죽으면

너는 푹신해질 정도로만 죽으라고 했고

난 그 위에 누워서 울고 싶었다

그럼 네가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있을까


눈싸리개 들판에 비추어 쌓일 때

나는 네가 더 이상 봄은 없다고 생각할까 봐 좋았어

평생 우리의 삶이 이곳에 머물길 바라면서

우리의 빨간 벽돌집은 설국에 지으려 했었어


나는 너의 동환이 아닌 동화가 되어 동화되어

한쌍의 눈사람이 되고 싶었어

사람은 눈사람이 될 수 없다고 해서

난 눈이 되고 싶었어


나를 너에게 덕지덕지 붙여 살아가게 하려고

때 되면 항상 내리고 싶었다

나는 너를 찌우기만 하면 되고

나는 내가 필요 없었다


어느 난간은 부탁같더라

매달리지도 못할 고층 난간 바라보며

난 꾸역꾸역할 봄이

두려워지기 시작했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 이유가 없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