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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enna Mar 19. 2024

열무 하나

컴퓨터를 정리하다가 우연히

3년 전의 나를 만났다. 

여러 회사 CI 색깔에 맞춰 작성한 어설픈 포트폴리오와

수십 번 복붙 해서 사용했었을

보여주고 싶은 내 모습만 있는 자기소개서,

그리고 화상 면접을 위한 준비용 영상까지.

그때도 나이가 꽤 먹었다 생각했었는데 지금 보니 영상 속 얼굴도 생각도 앳되었다.


취업준비를 하던 때를 생각하며 여러 파일을 열어 보고 있는데 면접용. txt라고 적힌 파일이 보였다.

면접을 볼 기회가 생길 때마다 채워가던 파일이었다.

파일 내용에는 여러 가지 예상 면접질문이 작성되어 있었는데 그중

나를 어떻게 정의 내리고 싶은가

라는 면접 예상 질문과 그에 대한 나의 대답도 담겨있었다.

단순 면접용이어서 짧게 작성해도 되었을 텐데.. 구구절절 길어진 내용을 보니 면접을 준비하다 내 하소연이 하고 싶어졌었나 보다


저는 밭에 마지막 남은 열무 같은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3년 전 내 꿈이 열무였다니... 내가 이런 답변을 작성했었는지 기억나지 않지만.. 음.. 그래 세 살 어린 나는 꿈이 열무였.. ㅋㅋㅋ


열무가 되고 싶었던 내 사연은 이렇다.

정말 열심히 버텼다는 스스로와의 타협으로

무작정 회사를 그만두고 나왔지만

문제는 가고 싶은 회사도 하고 싶은 일도 없었다는 게 더 큰 문제였다. 

그렇게 시간을 죽이며

시험도 떨어지고 취업도 안되고 나이는 먹어가다 보니 어느 순간부터 부모님과 밥을 먹으면서 나 혼자 눈치가 보이기 시작했다.

아무도 눈치주진 않았지만 내 마음이 무거워 출근하듯이 일어나고 청소를 하고 아침을 차리고..

취업이란 단어가 머리를 가득 채워 터지기 일보직전이었고  점차 줄어드는 통장 잔고는 지금 이런 생활을 유지하는 것이 옳은 선택은 아님을 경고하는듯 했다. 

잠을 자고 일어나 하루를 보내는 일상의 전부는 집에서 이루어졌고 단조롭고 끝나지 않을것만 같은 반복되는 평범한 취준생의 하루 하루였다



그러다 구청에서 하는 텃밭에 당첨이 되면서 오랜 백수의 일상에도 작 일거리가 생겨났다.


생활비를 못 드리니 채소라도 길러 밥상에 올리겠다며 나서는 게

 마음의 무게도 줄이고

매일 갈 곳이 생겼다는 점에서도 좋았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서 텃밭 동반자? 협력자도 생겼다.

바로 외할머니였다.


사실 우리는 그렇게 잘 맞는 협력자는 아니었다.

약간 서먹한 사이이기도 했고

막상 할머니가 매일 오시기 시작하자

나름 슬로우?농사 일을 추구하던 내 계획도 어그러지기 시작했다

적당히 상추나 키우고 하며 한 끼 잘 먹으면 될 줄 알았는데..


밭에 가보면 늘 먼저 와서 할머니가 물을 주고 사라지신 뒤라 물을 주는 나의 소소한 재미는 사라졌고  새로운 작물이 심어져있기도 해서 밭에 대한 나의 작은 계획들도 조금씩 어그러지기 시작했다.


그러다 급기야 할머니는 내게 열무라는 골칫덩이도 안겨주었다.

초보 농사꾼인 나에게 열무는 밭을 가꾸면 제일 먼저 심고 싶은 작물이었지만 싹도 여리고 벌레도 잘 먹어 키우기가 쉽지 않았다.

그리고 애지중지 키우던 열무도 할머니가 몇 개는 호박모종으로 바꿔 심어 버리기도 해 버렸는데 어이없게도

어정쩡한 밭 한가운데 다른 작물에 가려져 몰래 크던 열무만이 혼자 살아남은 것이다.

고추와 방울토마토 사이에 가려져 혼자 열심히 크다 수확시기를 놓친 열무. 

다른 작물들의 키를 넘기자 뒤늦게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고

저건 뻑쎄니 씨나 받아야 된다는 할머니의 판결 아래 유일하게 살아난 열무였다.


하지만 처음엔 소중했던 열무가,

달랑 하나 그리고 밭 가운데 혼자 미친 듯이 자라는 걸 보자니 여간 거슬린 게 아니었다.

조그만 밭을 구획별로 작물을 심고 싶었는데 그것도 불가능해졌고

어찌나 존재감을 내뿜는지 다른 작물이 열무 줄기를 피해 자라나자 괜히 열무가, 그리고 할머니가 미웠다.


꽃이 피고 씨를 받고.. 옥상의 꽃들은 꽃도 금방 피고 금방 지던데 열무 꽃은 금방 피지도 금방 사그라들지도 않는 거 같았다.

그리고 한참만에 씨를 받으니

이번에는 말리라고 하신다.

그 많은 씨를 까고 말리고..

이 시간들이 지나니 가을이 지나고 있었다.

씨 한번 받겠다고 이 기나긴 일련의 과정을 거치고 있자니 황당했고, 할머니에 대한 소심한 반항으로 씨를 다 말리지도 않고 그냥 아무 과자통에 담아 선반에 두고 잊어버렸다. 그리고 내가 어설프게 받은 씨가 제대로 된 씨앗의 역할을 할 수 있지도 않을거라 확신했다.


다음 해에는 밭에 당첨되지 않았고, 나는 원하는 곳은 아니지만 다시 직장인이 되어있었다. 몇달을 귀찮게 하던 열무도 내 기억에서 사라졌다.


단순히 매일 갈 곳이 정해진 것만으로도 마음의 위안을 얻던 내 마음은 어느새 휴일만 기다리는 여느 직장인의 마음으로 바뀌었고, 나는 내가 불과 몇달만에 내 머리를 가득 채운 고민거리가 전혀 다른 문제로 채워졌음을 의식하지도 못하고 있었다.

그러던 주말 어느 날 우연히 선반에 있는 씨앗통을 보게 되었다.

그리고 딱히 심는 시기는 아니었지만 문득 저걸 심어볼까 하는 호기심에 옥상 화분에 반신반의하며 훌뿌리고 내려왔고

다음 주말에 다시 옥상에 올라가 보니 내가 밭에서 심었을 때보다 훨씬 빼곡히 새싹이 올라와있었다.


씨앗으로서의 역할을 얕보고 의심했던 녀석들인데

심어주길 기다리고 있었던 것만 같이 심자마자 열심히 싹을 틔우고 자라나고 있었다.

할머니와 경쟁하듯이 밭을 가꾸던 일이 떠오르기도 하고 새싹들을 가만히 보고 있자니..

과거의 시점에서 미래인 현재의 내가 열무로 과거를 떠올린다는 점에서 열무씨앗들이 우리 밭의 미래였던 거 같다.

숨어서 크다 언젠가부터는 존재감을 내뿜고 눈의 가싯거리도 되었지만 우리 밭의 가장 오래 버티던 열무가 다음 해에는 여러 새싹을 틔웠다.


할머니랑 밭을 같이 가꾸지 않았다면 나는 열무 씨를 받을 생각은 전혀 못해봤을 것이다.

그리고 내가 보기 싫다고 뽑아버렸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을 터였다.

보이지 않는다고 존재하지 않는 건 아니라는 것도 열무한테 배웠다.

그래서 열무가 내 꿈이 되었던 거 같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게

내가 밭에서, 열무에게서 얻은 위안이다


3년 전 열무가 되고싶었던 나는

여러 씨앗을 만들기 위해 다시 준비했고 그 결과들이 내가 또다른 이직 준비를 할때 새 싹이 되어주었다.

아마 그때의 나는, 나를 평가할 면접관 분들에게 지금은 잘 보이지 않지만 언젠가는 존재감을 뿜뿜 내세울 거라고, 미래를 위한 씨앗도 만들어내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표현하고 싶었던 거 같다.

그리고 한번 물어봐주길, 내가 어떤 사람인지 표현 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질수 있기를 간절히 바랐었기도 했다.

뭐라도 하면 뭐라도 된다는 열무의 위안이

지금 다시 여러 고민으로 머리 속을 채워넣고 있는

오늘의 나에게 또 다른 느낌으로 다가오는거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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