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권에서 한국 음식은 k-pop 만큼은 아니어도 꽤 인기를 끌고 있다. 최근에 필리핀에서 한국의 삼겹살이 인기여서 시내에 삼겹살집이 많이 생겨나고 있다는 기사를 본 적이 있는데, 현지 사람에게 확인도 받았다. 돼지고기를 애정 하는 한국 사람으로서 나도 당연히 삼겹살을 좋아한다. 하지만 이 기사를 읽으면서 나는 재미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냐 하면 한국 사람인 나는 최근에 세계에서 가장 단순하면서도 맛있는 돼지고기 요리는 아마도 필리핀의 lechon belly 가 아닐까 라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돼지고기 맛을 아는 자와 모르는 자
돼지고기 하니 생각나는 일화가 있다. 나의 덴마크 동료를 초대해 돼지고기 요리를 해준 적이 있었는데 생각보다 맛있게 먹지 않는 모습이었다. 나중에 이야기를 들어 보니 사실 덴마크에서는 돼지고기는 가장 인식/선호도가 낮은 고기여서 손님이 왔을 때 내는 경우는 거의 없다는 것이었다 (물론 친하니까 솔직히 털어놓은 이야기인데, 자기 생각으로 덴마크에서의 고기 선호도를 고급 요리 순으로 나열하면 아마도 양-생선-소-닭-돼지 순일 거라고 했다). 그러면서 자신은 돼지고기가 가장 맛도 없는 것 같다고 했다. 이런 무지한 바이킹 놈 같으니! 하지만 그럴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서구권에서 맛있는 돼지고기를 먹어본 기억이 별로 없기 때문이다. 미국/유럽의 백인들은 대부분 지방 없는 살코기 부분 (lean meat = 퍽퍽한 부분) 만을 딱히 맛있지 않은 양념과 함께 먹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미국에서 그나마 맛있다고 하는 돼지고기 요리인 pulled pork 바비큐나 등갈비 구이도 많은 경우에 달콤한 바비큐 소스의 범벅일 뿐 돼지고기 지방 맛을 제대로 살린 경우가 드물다. 맛있는 돼지고기 요리를 먹어 본 기억이 거의 없으니 저렇게 생각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이 친구가 일찍이 바삭하게 구워 멜젓에 찍어먹는 두툼한 삼겹살, 잡내 없이 깔끔하게 삶아내어 쌈장이나 아삭한 김치를 곁들여 먹는 수육, 향긋하게 쪄낸 쫄깃한 족발, 불맛 나게 매콤하게 볶아낸 고추장 불고기 같은 음식을 맛보며 살았다면 아마도 저런 실언을 하지 못했을 것이다. 반대로 나는 돼지고기를 상대적으로 많이 먹는 가정 및 문화권에서 생활해 왔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돼지고기를 선호하는 입맛으로 개발되었을 것이다.
껍데기는 중요하다
이렇게 맛있는 돼지고기 요리를 많이 먹어본 내가 필리핀의 lechon belly에 특별히 반한 이유는 바로 이 요리 특유의 단순성과 텍스쳐 때문이다. Lechon은 스페인어로 새끼돼지(suckling pig)라는 뜻이다. Lechon을 이용한 돼지 통구이는 스페인 포르투갈 지역에서 유래되어 그들의 과거 식민지 음식문화에 영향을 끼쳤는데 필리핀의 경우 원래 있던 고유의 바베큐 문화와 결합하여필리핀의 각 지역마다 조금씩 다른 스타일로 정착한 것 같다. 내가 먹어 본 세부 스타일의 lechon belly 요리는 돼지 뱃살 한 덩이에 마늘, 파, 레몬그라스 등을 넣고 그대로 둘둘 말아 숯불에 오랜 시간 빙빙 돌리며 구워낸 요리이다. 아마도 문명이 발전하기 이전부터 존재했을 것 같은 원초적인 레시피이지만 사실 Slow cook만큼 맛있는 고기 요리법도 없다. 오랜 시간 저온의 열을 가하며 익힌 고기는 육질이 부드러워지고 육즙이 고기 전체에 퍼져 풍미가 좋다. 그리고 뱃살 전체를 통째로 구워내는 과정에서 돼지의 껍질 부분이 바삭해지는데 이것이 lechon belly 요리의 하이라이트다.
단순한 것이 아름답다.
잘 구워져 진한 갈색으로 반짝거리는 껍질 부분 (한국에서 불판에 구워 먹기도 하는 그 ‘돼지껍데기')을 입에 넣으면 바삭하다 못해 으적으적 소리가 날 정도다. 부드럽게 구워진 고기 부분과 지방 부분을 이 바삭한 껍질과 함께 먹으면 그 풍미와 텍스쳐의 조화가 진정 훌륭하다. 어쩌면 껍질 부분이 고기 부분보다 더 주인공에 가깝다는 점에서 역시 나의 최애 요리 중 하나인 북경오리를 연상시키기도 하는데, 북경오리는 껍질을 곱게 잘라 고기와 함께 전병에 예쁘게 싸 먹는 고급 식당 요리의 느낌이라고 한다면 이 lechon belly는 좀 더 거칠게 썰어 우적우적 씹어 먹는, 시장 식당에서 플라스틱 의자에 앉아 먹는 것이 더 어울리는 느낌의 음식이다.
Fat = Flavor
내가 살던 지역에 이 세부 스타일 lechon belly를 전문으로 하는 집이 있었다. 후줄근한 동네의 strip mall (큰 주차장을 끼고 슈퍼마켓과 식당, 가게들이 몰려 있는 미국 특유의 상가 형식으로 한국에서 생각하는 몰의 개념보다는 대형 아파트촌에 붙어 있는 동네 상가 건물에 가까운 느낌)에 위치한 곳이었는데 테이블이 4-5개에 불과할 정도로 작지만 사람이 항상 붐비는 관계로 주로 테이크아웃을 해 먹었다. 뭔가 힘든 노동을 마치고 종일 끼니를 제대로 챙겨 먹지 못했다는 느낌이 들 때 이곳의 lechon belly combo만큼 내 몸과 마음에 만족감을 주는 음식도 없었다. 따뜻한 밥 위에 새콤달콤한 파파야 샐러드를 곁들여 서빙되었는데 아무래도 기름진 음식이다 보니 파파야 샐러드와의 조화가 좋았다. 좀 더 기름지고 풍부한 맛을 느끼고 싶으면 흰쌀밥 대신 마늘 볶음밥을 선택할 수 있는데 마늘을 즐겨먹는 한국인이라 그런지 이 밥이 또 그렇게 감칠맛을 더해 주었다.
바삭한 껍질과 부드러운 고기, 마늘볶음밥과 파파야 샐러드의 조합
재미있는 것은 이 집에 붙어 있는 포스터였다. 여기 음식은 지방(fat)이 많은데 그래서 맛있는 것이니 감안하라는 내용이었다. 왜 그런 포스터가 붙었는지 이해가 된다. 일반적인 미국인들은 눈에 보이는 지방 특히 동물성 지방의 섭취를 상당히 꺼리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이는 오랫동안 의료계 및 언론에서 지방을 건강의 적으로 지목하여 저지방 음식을 강조하는 분위기가 있었던 데 기인하는데 최근에는 지방의 혐의가 조금씩 벗겨지고 설탕으로 그 메인 타깃이 변경되고 있는 중이다. 아무튼 지방은 맛있다. Salt Fat Acid Heat 이라는 요리책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 지방은 맛있는 요리의 핵심 요소중 하나이다. 지방 맛을 사랑하는 내 입장에서는 지방의 혐의를 벗겨주는 듯한 뉴스가 나올 때마다 기뻐하며 역시 자연적인 지방은 죄가 없다는 주체적 확증편향으로 빠져들곤 한다.
돼지 뱃살=지방=맛. 격하게 공감.
이 음식의 유일한 단점이라면 그리 힘들게 일하지 않았거나 배가 많이 고프지 않을 때 먹으면 특유의 포만감으로 인해 식후 약간의 죄책감이 든다는 정도인데 (추가 옵션인 ‘마늘 볶음밥'을 선택해 먹은 경우라면 죄책감이 배가된다) 뭐, 이러려고 가끔 샐러드도 먹고 소식하려고 신경 쓰기도 하니 괜찮을 거라고 내 죄를 스스로 사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