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알고 있는 단체에서 성폭력 사건이 터졌다. 여러 젠더의 사람들이 함께하는 워크샵에서 남성이 사회적 젠더폭력을 옹호하는 논리를 펼쳤고, 그 사건에 대해 제대로 된 사과나 공론화가 진행되지 않아 화두가 되었다. 무뎌진 감수성으로난 그 남성들이 했다는 말들이 성폭력임을 인지하기 위해 두 세 번을 다시 읽어봐야 했다. 너무 익숙한 말들이라 이 말들이 왜 성폭력인지 고민해야 했다. 그 자리에 있었더라도 깨닫기까지는 시간이 걸렸을 수 있다.
그 후 어느 날 아침 출근길에 들었던 팟캐스트에서는 성폭력 피해자가 자신이 겪은 것이 성폭력이라는 것을 인지하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리는 것이 흔한 일이라고 했다. 시간이 흐른 뒤에 공부를 하거나 다른 사람의 말을 듣다가 아, 이런 것도 성폭력이구나, 알게 되었을 때 비로소 자신의 경험을 성폭력으로 해석해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팟캐스트를 멈추고 교실 문을 열었을 때, 나는 고등학생 나를 떠올려냈다. 대치동 수학 학원 교실에 앉아있는 열 여덟 살의 나였다. 교실에는 나를 포함해서 세 명이 있었다. 나, 동갑의 남학생, 남성 학원 조교. 교실의 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남학생과 조교가 남성 자위에 관한 얘기를 하기 시작했다. 본인들이 자위를 얼마나 자주 하는지, 얼마나 걸리는지, 정액을 어디에다가 싸는지. 정액을 벽과 라면 봉지에 싸 봤다며 자랑을 해댔다. 정확히 얼만큼의 시간 동안 내가 그 사이에 끼어 있었는지 기억나지 않지만 꼭 한 시간처럼 느꼈다. 나는 안 들리는 척, 못 듣고 문제를 푸는 척을 해야 했다. 누구라도 교실 문을 열고 들어왔으면, 하고 바랐고 차라리 나가버리는 것을 상상했지만 나는 굳어서 자리에 박혀 있었다. 정말, 정말 그 이야기는 끝이 나지 않았다. 아직도 그 교실의 느낌이 생생하다.
내가 교사인 교실의 문을 열면서 내가 학생으로서 경험한 것이 성폭력이라는 것을 인지했다. 인지하기까지 거의 10년이 걸렸다.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했던 얘기를 할 수 있게 됐다. 나는 그날 곧바로 친구에게 그 얘기를 꺼냈다. 그런 적이 있었다고, 10년 동안 이름을 붙이지 못했던 이야기를 했다. 세 명이서 있던 그 작은 교실의 더 작았던 내가 안쓰러워서 눈물이 났다. 이제야 보듬어줄 수가 있었다.
지금이라면 어떻게 할까? 지금은 다를까? 열 여덟이 아닌 스물 일곱의 나였음에도 그 단체에서 오간 말들이 성폭력임을 인지하는 데 시간이 걸렸다. 지금 내가 또 비슷한 일을 겪으면 그걸 바로 알아챌 수 있을까? 알아채고 멈추도록 할 수 있을까? 그러지 못할지도 모른다. 그러지 못할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상관 없다. 그 시간은 그 사건이 성폭력이 아님을 나타내지 않는다.
학원에서의 성폭력 피해에 대한 글을 써서 기쁘다. 너무나 발화하고 싶었다. 너무나 외치고 싶었다. 이제라도 내가 당한 폭력을, 잊고 싶지만 또렷한 기억을 폭력이라고 부르고 알아줄 수 있어서 다행이다. 그 교실에 날 도와줄 선생님은 끝내 들어오지 않았지만, 이제 스물 일곱의 내가 들어가 함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