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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아 Oct 14. 2022

도망이 언제나 정답은 아니겠지만




 그놈의 한 달 여행이 왜 하필 지금이었냐 하면.


 작년의 여름부터 나는 이따금씩 모니터를 보면 숨이 막히곤 했다. 심각한 건 아니었다. 실제로 숨이 막혔다기 보단 느낌이 그랬다는 게 가까운 설명이겠다. 정말 어쩌다, 이따금씩 그랬으니까. 나름의 해법을 찾는답시고 노력도 많이 했다. 글을 써보기도 했고, 친구들과 선배들을 만나 상담을 하기도 했고, 책을 여러 권 읽었고, 운동을 했다. 일로부터 시선을 분산시키기 위해 여러 장치를 두는 필사의 전략. 그러다가도 다시 사무실에 앉으면 체한 것 같은 기분은 여전했다. 꿈에서도 아이데이션을 하다 깼다. 열정이 넘쳐서가 아니었다. 내가 무언갈 잘못하고 있다는 생각이 팽배해서였다.



 이직이 리프레시가 되지 않을까 했다. 그래서 오래 다니던, 사랑하던 조직을 떠났다. 더 넓은 세상에 던져지면, 그래서 내 시야가 트이면 달라지지 않을까. 결과만 놓고 봤을 때 이직 자체는 나에게 해답이 되어주진 못했다.



 가장 큰 문제는 ‘효능감’이었다. 내가 하는 일들이 나에게 어떤 효능감으로도 다가오지 못하고 있었다. 써낸 기획들이, 짜낸 아이디어들이 여러 가지 이유로 만들어지는 즉시 사라졌다. 그 어려운 걸 뚫고 해내는 과정에서의 쾌감이 이 일을 사랑하는 이유라고 확신했었는데 아니었다. 큰 일을 하고 싶었던 건 줄 알았는데 그것도 아니었다. 나는 큰일이 아니라 아주 작고 미비하더라도 내가 생각하고 상상하는 것들이 손에 만져지길 바라는 사람이었다. 큰 기계일수록 많은 부품이 들어간다. 설계도 상에는 모든 부품이 중요하지만, 사실 어떤 부품은 빠지더라도 기계가 움직이는데 전혀 영향을 주지 않기도 한다. 그 작은 부품이 되어버렸다는 사실이 나를 한없이 무력하게 만들었다.



 잠시 일을 멈춰야겠다. 그게 올봄 내가 내린 결론이었다. 사실 퇴사를 하면서 여행을 가야겠다는 건 계획에 없던 일이었다. 은근한 계획주의형 인간이라 그 정도의 장기 여행이면, 적어도 반년 전에는 모든 세팅이 완료되어 있어야 했다. 그런데 숙소는커녕 비행기 표도 안 끊었는데 여행이라니. 그럼에도 나가야겠다고 결심한 건 그게 필요한 일이어서였다. 나를 잠시 보호하는 일. 작은 부품으로써의 내가 아니라, 그저 나일 수 있는 시간을 확보해 주는 것. 선배들은 망설이는 나에게 ‘잠깐 쉬어도 인생에 그렇게까지 큰일이 일어나지 않는다’고 용기를 주었다. 용기를 내어 멈춤을 택했다.



 오랫동안 숙원해왔던 어떤 욕망이, 필요에 의해서 깨어난 셈이다. 내가 좋아하는 게 뭔지, 뭘 하면서 살아야 행복하게 일할 수 있을지. 하얀 모니터를 보면서 똑같이 하얗게 변해가는 머릿속을 잠깐 끄기 위해서라도 한국에서 최대한 멀리 떨어져 있기로 했다. 일을 잠시 멈추고, 일에서 멀어질 것. 어떻게 써야 할지 몰라 막연히 가둬뒀던 첫 퇴직금의 계좌를 열었다. 돌아와서 나는 괜찮을까. 먹고사는 데 문제는 없는 건가. 아니다. 돌아와서의 나는 나중의 일. 지금 중요한 건 오늘의 내가 괜찮아야 한다는 사실이었다. 도망이 언제나 정답은 아니겠지만 어떤 도망은 분명 다시 뛸 수 있는 원동력이 된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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