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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아 Nov 13. 2022

왜 여행은 생각보다 기쁘지 않을까




 여행에서 가장 설레는 순간은 공항에 도착한 직후다. 필요한 짐을 다 챙긴 건지, 빠뜨린 건 없는지 몇 번을 확인하고 수하물 제한 무게에 간신히 걸리지 않는 무게의 캐리어를 끌고 공항으로 향하는 순간. 그때 느끼는 여행에 대한 기대와 도파민은 최고치다. 반복되던 패턴에서 벗어나 새로운 일들을 겪게 될 것이란 기대가 가슴을 부풀게 한다. 공항의 매끈한 바닥 위에 캐리어 바퀴를 미끄러트릴 때 내 마음도 그 위로 데굴데굴 구른다. 깨끗한 빙판 위에 올린 구슬 같다. 발걸음이 가볍게 튀어 오른다. 어차피 사방이 어디론가 떠나는 사람들 투성이라 나의 여행을 부러워할 사람도 없고 자랑하지도 못하는데 동네방네 고함이라도 치고 싶다. 내가, 좀 있으면, 탄다고, 비행기를! 고개가 한 껏 위로 올라간다. 내가 이러려고 돈 벌었지 싶다. 노동의 대가로 얻은 기쁨이 이 정도다.


 그리고 여행이 가장 재미없게 느껴질 때가 언제냐면, 공교롭게도 현지에 도착한 직후다. 도파민의 부작용이라고 해야 할까. 생각보다 즐겁지 않은 마음 때문에 당황스럽다. 좁은 비행기에 구겨진 채로 몇 시간 동안 사육당하다 내린 탓에 적응이 안 되어서 일수도 있고, 어긋난 시차에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한 탓일 수도, 낯선 얼굴과 언어로 출입국 심사대에 서야 하는 긴장 때문일 수도 있다. 그래도 기다리던 풍경을 내 눈으로 담으면 신기하고 설레어야 하는데, 막상 그렇게 만난 여행지의 풍경은 새롭지가 않다. 익숙하다 못해 지루하다. 인스타와 블로그로 뒤져봤을 땐, 그 작고 네모난 화면으로 들여다봤을 땐 ‘내가 당장 저 자리에 있어야만!’ 하면서 씨근거렸는데 마음이 그때의 설렘보다 뒤처진다. 너무 많이 들여다봐서 그런가. 마르고 닳고 본 소개팅 상대를 실제로 만나면 실망하는 그런 마음이랑 비슷한 건가. 아니 아무래 그래도 한 달짜리 여행을 계획하고 도착한 건데, 어떻게 빅벤을 보고도, 런던아이를 보고도, 화려한 야경을 보고도 아무렇지가 않을 수 있는 거임? 왜 내일 뭐할지가 막막해서 머리가 하얘지는 거임? 대체, 와이?


 공갈빵이라는 게 있다. 이름부터 아주 깡패다. 먹는 사람한테 사기를 치겠다는 포부가 굉장하다. 눈으로 보면 빵빵하게 부풀어 올라서 속이 밀도 있게 채워져 있을 것 같지만 안에는 아무것도 없다. 온통 공기와 공갈뿐이다. 0과 1로 키운 여행의 기대는 꼭 그 공갈빵 같다.


 빅벤을 보고도 예상보다 재미있어하지 않는 나에게 당황하다 숙소로 들어왔다. 4인용 도미토리라 같이 방을 쓰게 된 다른 여행객들은 내일부터 일정이 빡빡했다. 우짜냐. 나는 이 마음으로는 내일 뭘 해도 노잼일 거 같은데. 다음날 계획했던 대로 내셔널 갤러리에서 시간을 보내고 크림 티를 먹고 뮤지컬을 봤다. 다 좋았다. 좋았는데 한쪽 구석엔 자꾸만 축축 처지는 마음이 있었다. 억지로 좋다고 즐겁다고 신난다고 마음을 끌어올리며 주문을 외웠다. 남들이 내 인스타 스토리 보면 마냥 행복하고 신나게 지내는 줄 알겠지. 이놈의 공갈, 이놈의 공갈빵.


 신기하게도 그 빈 마음을 메워준 건 계획에 없던 일들이었다. 뮤지컬을 보고 나서부턴 일정이 없던 나에게 저녁에 만나자고 제안해 준 숙소 동생 덕에 런던의 저녁을 구경했다. 사람 몸만 한 거위들이 유유히 호수 위를 유영하고 그걸 의자까지 펴고 앉아 얼마고 들여다보는 사람들. 크리켓을 하는 아이들과 잔디밭에 드러누워 태닝을 하는 커플. 근처 스탠딩 펍에선 삼삼오오 모여 퇴근 후의 피로를 맥주 한 잔과 수다로 푸는 직장인들까지. 그런 느긋한 풍경에 초조한 마음의 밀도가 느슨해져 갔다. 숙소로 돌아가는 이층 버스 맨 앞줄에서 본 소호의 풍경, 같이 끓여 먹은 짜파게티, 한국에서도 아직 먹지 못했던 수박, 서로의 예전 여행과 한국에 두고 온 고민 같은 것들을 쏟아 내는 대화. 느슨해진 마음 틈으로 그런 것들이 부어졌다. 실은 하나도 새롭지 않은 것들. 어디에서나 할 수 있는 것들. 그런데도 빈 마음이 따뜻하게 차오르기 시작했다.


 새로운 풍경을 감상하는 것만이 여행은 아니다. 우리의 여행이 꼭 그래야 할 이유는 없다. 여행을 떠나는 이유는 흩어져 있던 행복의 요소를 한 데 그러모아 들이마시기 위함이다. 그러니 만족스러운 여행을 위해선 평소에 나를 행복하게 해 주던 것들에 집중을 하면 된다. 그뿐이다. 남들과 다른 것을 해야 한다는 집착을 할 이유도 없다. 다정한 사람들과의 대화, 구름이 듬성한 하늘의 노을, 소박하고 따뜻한 식사 한 끼, 향이 좋은 커피와 고소한 디저트 같은 것들. 내 행복은 그런 것들이면 충분해질 수 있었다. 한 달의 시간 동안 뭘 할지 막막했던 마음이 창 밖의 기차 소음과 아득하게 멀어졌다. 내 식대로, 내 속도로 행복해지기. 그러기 위해 기어코 떠나온 것이었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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