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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달리 Jun 15. 2024

두 남자

 

군 복무 시절의 일이다. 지금은 전역 후 다른 삶을 살고 있지만 아직도 눈을 감으면 선한 기억들이다. 대학 진학 후, 진로 선택을 두고 고민하다가 직업 군인을 하기로 했다는 말을 아버지께 했을 때만 하더라도, ‘할 수 있겠냐.?’라고 반문하셨다. 평소 소심한 성격 탓에 말수도 많지 않으니 하는 말씀이었다. 그런 내가 많은 사람과 함께 동고동락하는 그곳으로 간다고 하니 걱정이 크셨을 거다.


 어느 정도 예상은 했다. 그도 그럴 것이 내가 나를 잘 알고 있었으니까. 때에 따라서는 사람들 앞에 나서야 할 때도 있다는 말을 들었다. 처음 드는 생각은‘ 내가 할 수 있을까?’였지만 곧바로 바꿨다. ‘군대도 사람 하는 일인데 데 별일이야 있겠어?’


 임관 후 첫 자대에 배치받은 곳은 강원도 인제였다. 부모님께서는 이 지역이 어떤 곳인지 주변에서 들으셨는지, 전활 걸 때마다 ‘거기 날씨는 어떠냐’,‘사람들하고 사이는 좋냐.’ 등등 질문만 반복하셨다. 그만큼 하나뿐인 아들을 걱정하셨을 터다.

우스갯소리로 ‘인제 가면 언제 오나, 원통해서 못살겠네’라는 곳에서 군 복무 중이니 두 분 마음이 오죽했을까.


 복무 중 용사들에게 병 자격 기본과목을 교육할 때 말을 더듬기만 하다가 끝난 기억, 혹한기 훈련 기간 중 야간 복귀 행군하다가 빙판에 넘어져 꼬리뼈에 금이 간 기억, 10년 전쯤 복무 염증을 느낀 나머지 술에 손을 대었다가 그것 잡을 수 없이 중독에 빠진 기억도 있다. 그중에서도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은 화장실 청소다.


 하사 때의 일이다. 당시 훈련은 대부분 부대 밖으로 나갔다. 혹한기 훈련도 다르지 않았는데 강원도 인제에서 근무하던 때라 온도계는 영하 20도를 훌쩍 넘기는 날이 대부분이었다. 그럴 때마다, 여기가 정말 같은 대한민국이 맞나 싶었다. 불과 며칠 전, 휴가 나갔을 때만 해도 얇은 티셔츠에 겉옷 하나를 걸쳤었으니까. 그것도 낮에는 더워 벗어놓고 다닌 적이 더 많았다.


 주둔지 밖으로 나갈 땐 임시 화장실이라고 해서 이동식으로 미리 준비해야 한다. 문제는 이런 화장실이 부대마다 보유하고 있지 않다는 것. 그럴 때면 인근 부대에서 빌려와야 했는데, 더 큰 문제는 또 있다. 이미 다른 사람들이 사용을 마친 화장실이다 보니 깨끗할 리 없다. 훈련을 마친 뒤 재정비를 해놓는 것이 보통이겠지만 매번 마음처럼 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처음 선임과 함께 화장실을 빌리러 갔을 땐 시범을 보여주겠다며 선임이 청소를 했고 나는 뒤에서 물 호스를 잡아주는 정도만 했다. 그러나 이번은 달랐다. 그때의 선임은 없었다. 얼마 전 전역했기 때문이다. 나와 운전병 둘이 전부였다.


 마스크를 썼다. 고무장갑을 착용했다. 혹시 몰라 앞치마까지 두르고 고무장화까지 신었다. 철저한 준비를 마쳤음에도 해결해야 할 문제가 하나 더 있었다. 하필 수도의 물이 얼어 근처 건물에서 직접 물을 받아다가 닦아야만 했다. ‘와….’ 함께 온 운전병은 마치, ‘저는 모르겠습니다.’라고 말하는 듯 멀리 떨어져 있는데 그 모습을 보면서 순간 화도 나면서 짜증이 밀려왔다.


 그렇다고 그만둘 수도 없는 노릇. 보고 배운 대로 물을 조금씩 부으면서 안을 청소했다. 곧 있으면 미리 협조해 둔 인분차가 도착할 시간이다. 조작병이 있겠지만 간부라고 해서 뒷짐 지고 있을 생각도 없었다. 내 앞의 선배도, 그 선배의 선배도 자신의 역할을 묵묵히 해왔을 테니까.


 보통은 외출 전 집에서 볼일을 해결하고 나갔다. 그러다 보니 밖에서 화장실을 이용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간혹 지하철이나 버스를 타기 전 잠시 들르는 것 외에는 기억에 없었다. 그것도 냄새가 나거나 밖에서 봤을 때 더러워 보이는 곳은 피할 정도였다.


집에서도 화장실은커녕 내 방 청소도 안 한다고 꾸지람 듣던 게 나였다. 그런 내가, 마스크에 앞치마까지 두르고 가족도 아닌, 얼굴도 모르는 사람이 남겨놓은 흔적을 청소하고 있었다. 얼마나 오래되었는지 흔적은 쉽게 없어지지 않았다. 하필 안에는 넣지 말아야 할 쓰레기까지 있었다. 아무리 기계로 빨아들인다고 하지만 미리 집게로 꺼내놔야 했다. 눈을 크게 뜨고 하나하나 건져 올렸다.


찌그러진 깡통이며 장갑, 물티슈 비닐을 비롯한 과자 봉지 등등. 곧 겨울이 얼마 남지 않았음에도 이미 온몸은 땀에 흠뻑 젖어 있었다. 눈이 따가웠다. 마스크를 뚫고 들어오는 냄새에 머리가 지끈거렸다. 그런데도 멈출 수 없었다. 내가 지금 이 일을 그만두면 누군가는 불편함을 느껴야 할 테니까.

선배의 모습이 떠올랐다. 묵묵하게 일을 마치고 담배 한 개비를 물고는 땀을 닦았던 그 선배는 늘 긍정적으로 맡은 일을 완수했다. 그런 모습이 나에게는 동기부여가 됐고, 그대로 따라 하는 중이었다.    

 

 초등학교 다닐 때 부모님께서는 작은 순대 국밥집을 운영하셨다. 가게 위치가 나쁘지 않았다. 주변에 커다란 공설 운동장이 있어 단체 운동을 마친 사람들이 주말마다 찾아왔다. 그럴 때면 나도 부모님을 도와 뚝배기 그릇을 날랐다. 손님들에게 물이며 부족한 반찬도 가져다줬다. 부모님의 일을 거드는 것이 옳은 일이라 생각했다. 그렇기에 근처에 사는 같은 반 친구들이 식당 이름으로 ‘순대’라고 놀려도 그러려니 했다.

 그런 나였음에도 딱 하나는 참지 못했다. 바로 화장실 청소다. 취기에 구토하는 사람도 많았고, 자주 막히는 변기를 뚫는 일은 상상도 안 했다. 냄새만 맡아도 헛구역질이 날 정도였다.


아버지께서는 비위가 약한 그런 나를 잘 알았다. 나는 그걸 이용했다. ‘화장실이 막혔는데요’ 한마디면 해결됐다. 내 눈으로 남의 흔적을 보는 상황은 오지 않았다.

 한 번은 아버지께서 배달 일을 나갔을 때였다. 저녁 손님이 몰려 어김없이 가게 일을 돕고 있었는데 화장실을 다녀온 손님이 하는 말이 들렸다. ‘저기요 사장님, 화장실에 토를 해놨는데요?’‘아…….;’


내가 해야만 했다. 주방에서 정신없이 음식 준비를 하는 어머니를 부를 수는 없는 상황이었고, 아버지 역시 언제 돌아올지 모르는 상황이었다. 처음에는 못 들은 척했지만 내가 해야 한다는 걸 알았기에 어쩔 수 없었다.

 화장실로 향했다. 문을 열자 화장실 안에는 이미 냄새가 코를 찔렀다. 구역질이 나오려는 걸 간신히 참았다. 하필 세면대 위에 일을 저질러 놔 물을 사용하기도 쉽지 않았다. 비닐장갑을 꺼내어 손에 꼈다. 휴지로 겉을 대충 닦아내고 물을 틀었다. 세제를 풀고 물티슈로 닦았다. 세제 냄새가 독했지만, 차라리 나았다.

때마침 배달 일을 마치고 돌아온 아버지께서 오셨다. 비위도 약한 네가 웬일이냐며 고맙다고 하셨다.


 사실 내가 해야 한다는 의무감보다는 그동안의 미안함이 더 컸기 때문에 한 일이었다. 식당일이 쉽지 않다는 건 누구나 안다. 그중에서도 고기 손질은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배는 더 힘든 일이다. 우리 국밥집이 유명한 이유는 여기에 있었다.


2~3일에 한 번 정도 아버지께서는 직접 도축장까지 찾아가는 수고를 하셨는데 올 때마다 돼지 내장을 잔뜩 가지고 오셨다. 음식 장사에는 신선함이 제일이라며 몸소 하시던 일이다. 그리고는 가게 뒤편에 마련된 곳에서 돼지 내장을 손질했다. 소화되지 않은 사료며, 미처 나오지 못한 똥이 가득한 내장을 직접 뒤집어 손질하셨는데 항상 문을 닫고 하셨다. 냄새도 냄새지만 내가 보지 않았으면 하셨단다.


 그걸 문을 열고 봤다. 잠깐이었지만 머리가 아플 지경이었다. 앞치마를 두른 부모님 두 분께서 목욕탕의자에 앉아 빨간빛 대야에 풀어놓은 내장을 손질하시는데 거의 30년이 다 되어 가는데도 생생하다.

 그날 저녁, 깨끗하게 손질된 고기를 삶아 내 앞에 내놓고는 아버지께서는 늘 그렇듯 물, 컵 가득 소주를 따르셨다. 나도 보통과 다를 것 없이 국물에 밥을 말아 깍두기를 베어 물고 고기 몇 점을 새우젓에 찍어 먹고 있었다.


“아들, 세상에 더럽다고 여겨지는 것이 생각보다 그렇게 더럽지는 않다. 오늘 아버지가 너와 엄마를 위해 돼지 똥을 닦아낸다고 해서 그 일이 더러운 일이 아닌 것처럼, 남들은 더럽고 냄새난다고 피해도 해야 하는 일이라면 해야 한다.”      


 한참을 집게 질을 하는데 인분차가 도착했다. 조작병이 능숙하게 호스를 풀고 전원을 작동시켰다. 둔탁한 기계 소리가 들렸다. 호스를 끌고 나에게 오는데 그걸 건네받았다. 이 상황이 낯선지 조작병이 한마디 했다. “어, 이건 제가 하는 일입니다.”“아냐, 네 일, 내 일 어디 있어. 이미 내가 시작하고 있었으니까 멀리 떨어져 있다가 신호하면 두 번 압력 올리는 버튼만 눌러줘.”


호스를 통 안으로 깊숙이 넣었다. “됐어! 압력 올려!”. 꾸물꾸물 호스가 세게 움직였다. 물에 녹은 검은색 무언가가 자꾸 튀어 얼굴에 닿을 것만 같았다. 보고 배우기만 했지 내가 직접 하는 건 처음이었다. 놓칠 것만 같아 더 세게 움켜쥐었다.

한참을 호스와 씨름 끝에 내용물을 인분차에 옮겼다. 호스에 물을 부어 헹궜다. 미처 옮겨지지 못한 덩어리가 보였지만 선배에게 배운 대로 솔을 이용해 닦으면서 처리했다.


 일을 마치자 인분차는 부대에 복귀했고 나와 운전병만 남았다. 근처 나무 그늘 밑에서 옷을 벗고 바닥에 앉아 가쁜 숨을 정리했다.

“담당관님 이런 일 해보셨습니까? 뒤에서 보니까 능숙하게 하시던데, 저에게는 물만 나르라고 하셔서 딱히 도울 일이 없었던 같아 가만히 있었습니다.”

“처음이지 뭐. 그냥 하는 거지. 그래 보였으면 다행이고. 내가 해야 할 일이면 끝까지 책임지고 해야 한다고 누가 그러더라. 저 화장실은 이따가 지게차로 실어준다니까 좀 쉬자.”


 용사로 입대하는 것보다 일이 쉬줄 알았다. 착각이었다. 더 나서서 해야 하고 그래야만 나를 따른다는 걸 이미 많은 경험을 통해 배웠다. 누군가에게는 세상에서 더럽고, 하기 싫은 일이었겠지만 어렸을 적 아버지의 등과 어른이 되어 만난 선배의 등으로 부터 책임감을 배웠다. 두 남자의 등이 생각나는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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