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님의 국밥 가게가 마지막 영업을 마치고 문을 닫았다. 두 분의 나이도 문제지만, 매일 새벽마다 일찍 일어나 돼지고기를 손질하느라 손마디가 아프다는 어머니와 배달 오토바이를 운전하다 빗길에 자주 넘어진 아버지를 보면 내가 보기에도 더는 무리였다. 그렇게 두 분의 합작이었던 국밥 장사는 열 번의 겨울이 지나고 끝났다.
평일 아침 일곱 시. 고등학생이었던 내가 이 시간에 집을 나설 때면 집안은 늘 고요했다. 하지만 오늘만큼은 달랐다. 부모님께서 주무시는 방문 틈으로 아버지의 코 고는 소리가 들렸기 때문이다. 낯선 상황에 나도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갔다. 행여 현관문 닫히는 소리가 클까 봐, 마지막까지 두 손으로 꾹 눌러 닫았다.
국밥 가게는 동네에서 맛집으로 유명했다. 퇴근 시간 무렵에는 자리 찾기가 힘들어, 가게 앞 보도블록까지 간이 식탁을 펴는 날도 있었다. 또 어떤 날은 번호표를 받고 기다리는 사람도 많았다. 그 광경을 보고 있노라면 괜히 어깨가 으쓱해질 정도였다.
가끔 학교를 마치고 부모님을 도운다는 핑계로 야간자율학습에 빠진 적도 있었는데, 그럴 때마다 '무슨 고등학생이 아르바이트냐며 창피하니까 집에 들어가라'. 는 말을 하시긴 했어도 등 떠밀진 않으셨다. 대신 못 이긴 척 행주를 손에 쥐여주셨지만.
처음부터 이렇게 적극적이었던 건 아니다. 부모님에 대한 사랑보다 창피함이 더 컸던 시기였다. 내가 여덟 살 때부터 문을 연 국밥 가게는 당시 다니던 초등학교 앞에 있었는데, 간판까지 크게 만들어 세웠다. 이름은 ‘파주 순대'. 아버지의 고향 지명과 순대국밥 집이라는 의미를 넣으셨단다. 덕분에 나는 초등학교에 다니는 내내 별명이 '파주 순대'였고. 그 당시에는 부모님이 미웠다.
한 번은‘왜 이런 일을 하느냐, 다른 부모님들처럼 회사 다니면 안 되냐, 우리 집 자동차는 왜 트럭이냐, 남들은 다 승용차 타고 다니는데. '라고 울면서 부모님 앞에서 악을 쓴 적도 있다. 그때 두 분은 묵묵히 듣고만 계셨다. 화라도 내면 차라리 마음이 편했을 텐데. 벌써 20년도 더 지난 일인데 어제 일처럼 생생하다.
내가 변하게 된 건 몇 가지 일 때문이었다. 당시 가게 근처 골목 끝에는 고물상이 새로 생겼는데, 나이 많으신 할아버지, 할머니, 거동이 불편한 사람들이 가게 앞을 자주 지나갔다. 평소 같으면 수레를 밀고 지나갔을 텐데…….; 날이 더웠는지 한 명 두 명 가게 안으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사장님, 물 한 잔만 얻어 마실 수 있을까요?'라는 부탁에 어머니는 하던 일을 멈추고 물 잔을 가져다주셨고 물 잔을 받은 사람들은 감사 인사를 건네고 곧바로 나갔다.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주변에 음식점 하나뿐이다 보니 ‘물 한잔'을 찾는 발걸음이 많아졌기 때문이다. 그걸 본 아버지께서는 아예 정수기를 현관문 밖에 옮겨 설치하셨다. 설치를 마친 아버지께서는 신문지 속 광고지를 한 장 꺼내고서는 뒷면에 빨간빛 매직으로‘물은 셀프'라고 썼다.
나중에 알게 된 건데, 가게에 들어오면서 괜히 자존심 상할까 싶어 해 놓으셨단다. 물 한잔이지만 눈치 보지 않고 마셨으면 해서 한 일이었다.
국밥 가게를 열기 전까지만 해도 가정형편이 좋지 않았다. 예전의 우리 집은 하루에 두 번 올까 말까 하는 시골 마을의 외진 곳이었다. 집이라고 하면 지붕과 벽, 현관문까지는 있어야 어느 정도 구색을 갖추었다고 할 텐데, 그 당시 내가 사는 곳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집과는 조금 모양이 달랐다.
최신식으로 지어진 지 얼마 안 되어 보이는 2층짜리 양옥 건물의 울타리에 우리 집 담장이 반쯤 잘려있었다. 집을 들어가려거든 남의 집 마당을 지나야 만 했다. 가진 돈이 없어 방 한 칸, 거실과 이어지는 연탄아궁이가 있는 집이었다. 화장실도 건물 옆 작은 창고를 지어 만들었는데, 겨울철에는 그 추위를 엉덩이로 고스란히 느껴야만 했다.
처음엔 이런 환경이 당연한 줄로만 알았다. 그러다가 양옥집 주인 할머니의 손자가 놀러 와 자기 집 자랑에 가난과 창피함을 느꼈다. 그날 밤 나는 부모님께 다른 곳으로 이사 가자고 한참 동안 떼를 썼고, 끝내 내가 걸리셨는지 다음 해 봄, 시내로 이사를 했다.
많은 것이 항상 부족했다. 나도 제대로 된 집에서 살고 싶다며 떼를 썼다가 어머니께 크게 혼나기도 했다. ‘그럼, 그런 부모 찾아 나가!'라는 말을 들은 적도 있었다. 나에게 어머니는 늘 엄한 사람이었다. 강하고, 우직한 사람. 가난을 이겨내기 위해 강함을 선택한 여자. 그런데도 마음만큼은 누구보다 넓고 속 깊은 사람이라는 걸 뒤늦게 알게 됐다.
어느 날 거동이 불편하고 옷차림까지 더러워 보이는 한 남자가 가게 안까지 들어온 적이 있었다. ‘사장님, 제가 돈이 없어서 그런데, 오늘 한 번만 외상으로 밥 한 공기 좀 먹을 수 있을까요.?'
어머니는 정말 돈이 하나도 없냐는 질문으로 응수했다. 한참을 이곳저곳을 뒤지던 남자는 구겨진 천 원짜리 한 장을 내밀었고 어머니는 그제야 국밥 한 그릇을 내어 줬다. 고기와 향긋한 파 고명까지 뚝배기 가득 얹어.
식탁 앞에 앉아 쭈뼛대던 그는 주방에 뚝배기 그릇이 보이자마자 벌떡 일어나 그릇째 들고 와 숟가락으로 국물을 떠먹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이런 광경은 자주 볼 수 있었다. 어머니는 그런 분이셨다. 나에게는 항상 엄하고 오백 원짜리 동전도 소중하게 여기시면서도 메뉴에 오천 원짜리 국밥을 단돈 천 원에 내어주시는 분. 공짜로 주면 자존심 상할 수도 있으니 꼭 천 원짜리 한 장은 받아내셨다. 정말 돈이 없으면 큰 사거리 신호등 근처 휴지라도 몇 개 줍게 하셨고 그 보상으로 국밥을 내어주신 적도 있다.
나는 조금이나마 도움을 드릴 생각에 손님 식탁에 깍두기, 김치 등을 가져다 드렸다. 많은 도움이 되지는 못했을 텐데도 어머니께서는 종종 고맙다며 앞치마에서 천 원짜리 한 장을 꺼내어 주셨다. 그럼 나는 그걸 받아서 계산대 위에 놓인 플라스틱 함에 넣었다. 일종의 기부였다. 천 원짜리 국밥을 위한 기부. 어떤 때는 단골들도 넣는 걸 봤다. 어머니는 일정량이 모이면 그 돈을 들고 시장에 가 돼지내장을 사다가 국밥을 끓이셨다.
나는 부모님 가게 안에서 하는 일은 모두 경험해 봤다. 서빙, 설거지, 청소, 손님의 심부름 등등. 유일하게 하지 못한 건 고기 손질이었다. 도축되어 곧바로 시장으로 배달되는 돼지내장은 안에 미처 세척하지 못한 똥 천지다. 그걸 가져다가 가게 뒤편에서 직접 씻고 커다란 통에 삶아야만 비로소 국밥에 담을 수 있는 음식 재료가 된다. ‘재료 손질이 뭐 어렵다고…….' 했다가는 큰코다친다. 얼굴이나 옷에 튀기라도 하면…….;
가끔은 아버지께서 방금 삶은 고기라며 종지에 몇 점을 담아내어 주셨는데 그건 먹어본 사람만이 안다. 일종의 돼지고기 수육이랄까. 육질이 부드러워 입에 넣어 몇 번 씹으면 없어질 정도였다. 고기를 삼키고 아버지께 여쭈어봤다.
"언제까지 가게 하실 거예요?. 저도 이제 대학 들어가면 도와 드리기 힘들 텐데."
"우리 걱정하지 말고 아들 공부나 열심히 해. 그게 부모 걱정 덜어주는 거야."
며칠 전 고기 손질에 사용하는 칼에 손을 다쳐 비닐장갑으로 묶은 걸 보고 한 말이었는데 순간 괜히 말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버지는 다시 일어나 주방 뒤로 가셨다. 빨간빛 앞치마를 두르고선, 내장 손질을 시작했다. 반소매 차림에 양팔에는 흰색 위생용 토시가 끼워져 있었는데 여느 회사원의 셔츠보다 멋있어 보였다. 나는 그렇게 두 분을 통해 사랑을 배웠다.
내가 직장에 취업하면서 천 원짜리 국밥은 명맥이 끊겼다. 세월 앞에 장사 없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평소 부모님과 통화를 자주 하는 편은 아니지만, 오늘은 꼭 해야겠다. 자랑할 일이 하나 생겼기 때문이다.
잡지사에서 주관하는 공모전에 선정되어 상금까지 받은 것. 선정 발표는 진작에 났지만 실제로 눈으로 보기까지는 믿어지지 않아 주변에도 말하지 않고 있다가 오늘에서야 내 계좌에 상금이 입금된 것을 보고 기쁘게 해 드려야겠다는 생각에 전화번호를 눌렀다.
"제가요, 시 쓰기 공모전에 당선되었지 뭐예요. 상금도 받았습니다. 그래서 이건 두 분 필요한데 쓰시라고 보내드리려고요."
"어이 구야. 축하한다 아들. 근데 상금까지는 필요 없다. 너 필요한 데 써라. 아니면 주변에 어디 필요한 곳에 마음을 보내는 것도 좋겠다."
늘 그랬다. 본인보다는 나 먼저였고, 우리 가족보다는 조금 더 부족한 이웃을 보는 부모님의 성격 탓에 학창 시절의 나는 유명 업체 옷, 신발 한 번 산적이 없다. 대신 자주 가는 시장 잡화점에서 시기마다 사주셨는데 가끔은 창피하기도 했다. 남들 다 신고 다니는 나이키 운동화 한 켤레 가지지 못했으니까.
다행히도 어른이 되면서 그런 마음은 오래 안 갔다. 단돈 천 원 벌기도 힘든 세상이라는 걸 직장 생활하며 배웠고, 기억 속 두 분 역시 늘 시장표 옷만 입었으니까. 그 돈을 모아 천 원짜리 국밥을 끓인 거였다.
평소 시를 읽으면서 생각을 많이 했다. 삶에 지쳐 있을 때면 더 읽고, 쓰기를 반복했다. 그럴 때마다 옆에서 위로 나를 위로해 준 건 시 속 화자였다. 그들은 조용히 내 곁에서 말을 들어주고 때로는 어깨를 토닥여줬다.
일상에서 흔히 쓰는 '덕분에'라는 말이 있다. 풀어 보면 ‘덕을 나눈다.'라는 의미다. 어떻게 보면 ‘덕분에' 얻은 행복, 행운, 기쁨을 혼자 간직하지 말고 곧바로 다른 곳에 나누라는 말은 아닐까. 내 생에 첫 상금을 받은 기쁨은 잠시였지만, 좋은 곳에 쓰이길 바라는 마음 덕분에 그때의 행복이 지금까지 이어지는 중이다.
그때를 이어, 매달 받는 월급에서 일정 금액을 자동이체 해뒀다. 수신처는 적십자다. 적은 금액이지만 나는 부모님의 천 원짜리 국밥을 이어 나만의 기부를 하는 중인 셈이다.
‘행실이 높고 탐욕이 없음'이라는 청렴의 뜻만 본다면, 지체 높고 덕목을 두루 겸비한 다산 정약용 같은 '청백리 위인'을 떠올리게 된다. 나를 위인에 비교하는 게 가당키나 하겠느냐마는, 얼마 전 읽은 목민심서에 따르자면 백성사랑 육조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야말로 '사랑'을 실천하는 행동이라 본다.
이제는 부모님이 끓여주신 국밥을 먹을 수는 없지만, 어른이 되어 두 분이 몸소 보여주신 행동은 청백리 위인의 표상이 되고 있다. 생각해 보면 청렴한 공직자라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다. 책임감을 느끼고 공정한 임무에 임하는 태도, 나의 주변부터 살피는 일. 그것이 첫 시작이다. 누가 나에게 ‘너는 청렴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느냐?'라고 묻는다면 자신 있게 '네!'라고 대답하고 싶다.
아침부터 비가 내리더니 퇴근 시간에 되었는 데도 그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20년 전의 뜨끈한 국밥 한 그릇이 생각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