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렴한 고모부의 이야기
어린 시절의 나는 두 번의 겨울을 셋째 고모, 고모부 댁에서 보냈다. 부모님께서 새벽마다 트럭에 물건을 싣고 나가 행상으로 생계를 유지해야 하는 까닭에 어쩔 수 없이 결정된 일. 벌써 30년도 더 된 기억이다. 그런데도 눈을 감고 그때를 떠올리면 그 시절 고모부가 생각난다. 그 시절의 나에게는 할아버지와도 같은 존재였다. 날이 풀린 날에는 마당에 불을 피워 고기를 구워 주신 적도 있었고 고구마를 구운 적도 많았다. 기억 속 시골 풍경을 떠올리라고 하면 누구든 쉽게 말할 수 있는 보통의 나날들. 그 시절의 고모부는 때로는 친구이기도 했고 때로는 아버지 같기도 했다.
고모부의 직업은 시내에 있는 아파트 시설 관리자였다. 진한 남색 작업복을 입고 이른 이슬을 맞으며 출근했고 퇴근할 땐 시장표 통닭을 한 마리 들고 오기도 했다. 당시만 해도 급여가 넉넉하지 않을 때였을 텐데도 나의 어린 시절 기억에는 퇴근하는 고모부의 손에는 늘 무언가가 들려 있었다.
한 번은 고모부 손에는 못 보던 흰색 종이 가방이 들려 있었다. 내 선물인가 싶어 신이 난 나는 얼른 두 손으로 받으려 했다. 안에는 내가 제일 좋아하는 과자 선물세트가 담겨있었다.
"어허. 이건 우리 것이 아니야. 잠시 맡아 준 거야. 내일 돌려주어야 하니까, 손대면 안 돼.!”
‘이게 무슨 말인가, 이 집에 애라고는 나밖에 없는데.!’ 뒤에 서 있던 고모께서도 의아해하면서도 고모부 옷과 종이가방을 받고서는 내 손에 닿지 않는 곳에 올려놓으셨다.
밤늦도록 뒤척였다. 선물로 주시려는 거면 진작에 주시지. 왜 그러실까…….; 누워서도 흰색 종이가방이 눈에 아른거렸다. 안에 담긴 달콤한 과자와 사탕, 젤리까지.
한 편으로는 내 손에 쥐여주시지 않은 건 무슨 일이 있나 싶기도 했다. ‘어디 다른 곳에라도 보내시려는 거겠지?' 평소에도 마을 회관에 가셔서 시설도 고쳐주시고 하니까, 나 말고 다른 분들 드리려나 보다’. 나는 그렇게 자신을 위로했다.
시간이 흘러 성인이 된 나는 친척들이 모여 음식이 차려진 식탁 앞에 앉을 때면 늘 고모부 옆에 앉았다. 평소에도 반주를 즐기시느라 밥공기 옆으로 항상 소주잔이 놓여있었는데 그 잔을 채우는 건 내 몫이었다.
한참을 웃으며 시간을 보내던 중에 넌지시 고모부께 물었다. 나 어렸을 때 과자 왜 안 주셨냐고, 어디 가져다주신 거냐고. 고모부께서 따라주시던 소주잔에 취기가 생겨 던진 질문이었다. 옆에 계시던 고모께서 옆구리를 쿡 꼬집는 바람에‘윽'하고 비명이 나왔다.
듣고 보니 그때의 과자는 내 것이 맞았지만, 그 안에 담겨있는 다른 종이 뭉치는 내 것도, 고모부의 것도, 그 누구의 것도 아니었다. 만 원짜리 뭉치가 몇 다발 들어있었다고 했다. 종이가방은 아파트 주민 중 하나가 준 것이었다. 안에 나 챙겨줄 과자만 보여 ‘감사합니다.'라며 받아오셨단다. 돈이 들어있는 건 집 앞에서 알게 된 거였고.
그때까지만 해도 핸드폰이 없던 시절이다. 늦은 시간이라 어떻게 할 도리가 없어 우선 집에 들고 오셨고 다음 날 아침 출근하자마자 그 물건을 주인에게 돌려주었다고 했다. 내막은 이랬다. 당시 아파트 시설 보수 문제로 사설 업체가 몇 군데 들어왔는데 대단지 다 보니 이에 익을 많이 얻을 수 있어 너도나도 사업을 따려고 한 것. 그중 하나가 시설관리에 있어 주요 책임자였던 고모부께 선물을 한 것이었다.
평소에도 손주 같은 조카가 집에 있다고 주변에 자랑 말하고 다니시던 탓에 호의를 가장해 뇌물을 제공한 것이었다. 졸지에 고모부는 뇌물 수수자가 됐다. 사실 요즘이야 청탁이다, 비리다 한다지만 그 시절에는 어느 정도 눈 감고 통용되던 시절이 아니었겠는가.
하지만 고모부는 달랐다. 평소에도 일 하나만큼은 잘한다고 소문나셨던 것도 있었지만 친절한 미소, 업무태도가 남달라 수십 년이 지난 지금도 현장에서 일하고 계시는 분이다. 가끔은 친절이 과해 오지랖 부린다며 불편해하는 사람도 있다지만 모든 건 몸도 정신도 늘 건강하게 유지하신 덕분에 가능했던 일이다.
아버지께 듣기로는 고모부의 어린 시절도 넉넉하지 못했다고 한다. 친척 중에서 1950년 6.25 전쟁을 유일하게 겪은 분이기도 했다. 올해 여든이 넘으신 나이임에도 어디 하나 불편하다고 말한 적 없다. 이만큼 되기까지 안 해 본 일 없이 다 해봤다며 자랑하시긴 하지만 부끄러운 짓은 한 번도 해 본 적 없다고 자랑까지 하셨다. 그럴 때면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레퍼토리가 있다. 나에게 공무원으로서 부끄러운 행동을 하지 말라는 말이다.
"조카! 우리 집안에서 공무원은 혼자인 거 알지?, 나 때는 공무원이 최고였어. 뭐니 뭐니 해도 우리 집안의 자랑은 조카여!”
평생을 경기도에 사셨는데도 어디 지역 억양인지 모를 사투리까지 써가며 하시는데, 소주잔을 들고 하시는 통에 본심인지 이는 모르겠지만 기분은 좋았다. '집안의 자랑'이라는 말에는 어깨가 으쓱해지고.
본인도 공무원이 되고 싶었지만, 초등학교조차 제대로 나오지 못한 자신의 처지와 어렸을 때부터 기술을 배워가며 가족을 부양했다는 말에는 숙연해지기도 했다. 실제로 아버지도, 다른 어른 모두 학교를 제대로 다니지 못했던 시절이었다. 다들 흔히 말하는 기술 밥을 먹고살았다. 아버지는 그것조차도 못해 뒤늦게나마 장사를 시작했다. 그런 집안 어른 들게 내가 공무원으로 진로를 정했다고 했을 땐 얼마나 기특하다고 생각했을까.
어른이 된 나는 종종 어린 시절 기억 속 고모부를 떠올린다. 그때의 나에게 달콤한 과자를 손에 쥐여주지는 못했지만, 평생의 달콤함을 선물로 주셨다. 잠깐의 즐거움은 시간이 지나면 기억에서 사라지기 마련이지만 청렴하신 고모부는 마음속 자랑스러운 위인이다. 어느덧 직장 생활한 지 20년이 되어간다. 그런데도 집안 모임에 참석하면 아직도 어린아이 취급이다. ‘물 조심해라. ' ‘차 조심해라. ' ‘몸 건강이 최고다.' ‘술은 조금만 마셔라' 등등. 그중에서도 자주 듣는 말은 거짓말하지 말라는 거다. 우리 집안의 가훈이라나.
나도 가끔은 핑계를 대며 거짓말을 하고 싶을 때가 있다. 회식 자리가 길어져 다음 날 아침 몸이 힘들 땐 아프다는 핑계, 민간 업체 출장 정비 중 넉넉하지 못한 여비 핑계로 받는 음식이나 기타 향응. 그 외에도 부정한 방법의 업무 시도, 피곤한 일의 근무 태만 등등의 거짓말 말이다. 그럴 때마다 지난겨울 추억 중 한 페이지를 꺼내어 읽으며 다짐하고는 한다. '나는 우리 집안의 자랑, 청렴한 공직자'가 이래서는 안 되지 않겠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