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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현기 Mar 31. 2024

알코올 중독자


중학교 때 기억이다. 몇 일째 입맛도 없고 소화가 안 된다는 아버지가 걱정되어 어머니 손 붙잡고 두 남자가 병원을 찾았다. 늘 바쁜 식당일에 쫓기다 보니 ‘제때 식사를 못 해 탈 정도 났을 거니, 큰 병 아닐 거다.'라며 했던 말이 생각난다. 별일 아닌 듯 어머니께 무심한 척했다지만, 수 십 년 전의 기억 속의 내 눈에도 그날의 아버지는 아주 달랐다.

간단한 검사만 진행할 것이라고 했는데, 닫힌 진료실 문은 한참이 지나도 열리지 않았다. 로비 의자에 앉아 앞에 놓인 의자 다리를 차는 것도 지겨울 때쯤 다른 간호사가 그곳으로 들어갔다. 그 뒤를 따라 흰머리가 가득한 남자 의사까지.


곧이어 어머니 손 붙잡고 들어선 진료실에는 방금 들어간 의사, 간호사까지 모여 큰 화면에 보이는 흑백 사진을 한참 동안 봤다. 추가로 정밀 검사를 해봐야겠지만 이곳의 소견으로는 암이었다. 그것도 간암.


아버지께서는 평소에도 가게 문을 일찍 닫는 날이면 옆집 떡볶이 장사하는 아저씨를 불러다 술을 마셨다. 그 덕분에 그 앞을 지나갈 때면 내 손에 떡꼬치를 하나 들려주기도 했지만, 그땐 몰랐다. 값비싼 달콤함이었다는 것을.




병에 걸리면 얼마나 아픈지 겪어봤다. 감기에 걸려 이불 깔고 누워있을 땐 천장이 빙글빙글 도는 기분까지 들었고 멈추지 않는 기침 때문에 목이 아팠다. 암은 어떨까? 아버지께서는 얼마나 두려울까? 많이 아프지 않았을까?


달 때쯤 지나 서울 큰 병원을 찾아 조직검사를 했다. 소식을 들었는지, 아버지의 누나 몇 분께서 병원까지 함께 했다. 불행 중 다행인지 결과는 1기였다. 초기였고 크기가 작아 항암제 치료를 시작하기로 했다. 곧바로 입원 절차를 밟았다. 따뜻한 봄날에 헤어진 아버지께서 다시 집으로 온 계절은 그해 겨울이었다. 그때 집에 오자마자 나에게 한 말이 아직도 생생하다.


"내가 다시는 입에 술을 대나 봐라. 아들! 집에 술병 다 치워라.”


사람은 망각의 동물이라 했던가, 그 말을 한 사람은 분명 우리 아버지를 만났을 거다. 퇴원하고 나서 1년이 지나면서 다행히도 완치 소견을 받았을 때, 아버지는 다시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배 속이 탄다. 송곳으로 뚫는 기분이다. 눈을 뜨니 새벽 세 시가 넘었다. 침대는 식은땀 범벅이다. 구역질이 나고 힘이 없다. ‘저녁에 먹은 게 잘못됐나.…….'


언제부터 마신 술인지 모르겠다. 저번 주에는 지방 출장이 있어 운전하느라 건너뛰었으니까, 그다음 날부터 매일 연속이다. 몇 번 술자리를 같이하던 동료들은 ‘너하고 먹는 것도 이제 지쳤다.'라며 나가떨어졌다. 이 사람이 아니면, 다른 사람, 그도 안되면 술 파는 집에 가면 그만이다. 같이 술 마시는 사람 없어도 돈 만 있으면 마실 수 있으니까. 중독이었다. 알코올 중독.




술에 취하지 않으면 잠들기 힘들었다. 우선 뜨거운 속을 식힐 요량으로 찬물을 벌컥벌컥 들이붓다시피 마셨다. 괜찮겠지 하고 있어 보니 그럴 상황이 아니다. 손발이 떨리고 바닥이 빙빙 돌았다. 두려움이 엄습했다. ‘불 꺼진 방바닥에 이대로 쓰러져 있다가 죽는 건 아닐까? 내일 아침에 눈은 뜰 수나 있을까?.’안 되겠다 싶어 119를 불렀다. 바닥에 엎드려 배를 잡고 있는데 별의별 생각이 다 났다. 엊그제 어머니 전화가 생각났다.


‘그때 화내지 말걸…….; ' 이혼 이후 이어진 알코올 중독. 하나뿐인 아들 걱정하는 부모 마음으로 하셨을 텐데 후회됐다.




얼마나 지났을까, 요란한 응급차 소리가 들렸다. 방문을 열어 주자마자 그 자리에서 쓰러졌다.


병원까지 가는 동안 정신이 들었다가, 놓치기를 반복했다. 기억나는 건 마지막으로 응급실 침대에 누워있는데 긴 관이 입으로 들어오고 위 속에 있던 걸 토해냈을 때다.


"정신 차려보세요. 환자분?."


형광등 불빛에 한쪽 눈만 간신히 떴다. 주변을 살피는데, 천장이 자꾸만 동그라미를 그리며 움직였다. 들어보니 위경련이 심하게 일어난 것 때문이었는데, 계속 이어진 술 때문이란다. 급한 대로 응급처치를 했고 그 외 혈액 검사 결과가 나와봐야 알겠지만, 주요 장기의 기능이 떨어져 있을 수도 있다고 했다.


그러고 보니 요즘 들어 소화가 잘 안 되고 식은땀을 자주 흘렸다. 탈이 나도 제대로 났나 보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직장에 휴가를 신청했다. 차마 술 마시다가 응급실에 왔다는 말은 못 했고 대신 저녁 식사 때문에 장염에 걸렸다고 했다. 그날 안주 삼아 먹은 음식도 저녁 식사였으니, 거짓말은 아니었다.




다음날 소변 검사, 혈액 검사, 위내시경 촬영, 복부 ct 외에도 몇 개를 더했다. 오후쯤 되어 의사와 진료 상담을 하면서 죽을 뻔한 고통을 계속 느끼고 싶지 않으면 술을 끊으라고 권했다. 도움이 될 수 있다면 정신과 처방을 겸해줄 테니 병행하면서 중독을 치료해 보라는 말과 함께.


그 새벽 응급차 안에서 아마‘다시는 술 마시나 봐라.'를 머릿속에서 수 천 번은 외쳤을 거다. 이 사달이 난 것도 술이 원인이었으니까.




며칠 동안 정신과 상담을 했다. 세상 모든 불행은 나에게만 일어났다고 생각했고, 나만 빼고 모두 행복해 보였다. 내가 이렇게 된 이유를 세상 탓으로 돌렸다. 이혼 이유는 상대가 나 몰래 대출을 일으켜 사업을 하다가 망했기 때문이었고, 처음에는 이런 나와 가족을 도와줄 형편이 못 된다며 ‘알아서 해라' 말로 통화를 끊은 부모님 탓을 하기도 했다. 상담을 진행하면서 의사에게 물었다.


“나만 왜 이렇게 불행한 걸까요?”


"정말 불행한 일일까요? 혹시 그렇다고 단정 지은 건 아닐까요?"


"아, 정말요……?; 선생님, 이번 주부터는 수면 제양을 조금 줄여 볼까 합니다. 술 마시는 그것도 좋은데 요즘은 다른 일에 관심이 가서 밤에도 하거든요.”


사실 그때만 하더라도 술 마시는 일 외에는 퇴근 후, 할 일이 딱히 없었다. 그런 내가 술을 마시지 않으니 생활이 완전히 변 할 수밖에.


예전에 했던 자격증 공부를 할까 하다가도 금방 포기했다. 재미가 없었다. 특별한 목표가 없었으니 그럴 만도 했다. 대신 책을 읽기 시작했다. 처음부터 한 권을 전부 읽어볼 생각은 없었고 시간 보내기 용으로 시중에 유명한 수필집을 구매해 읽고 있었다.


"아 그래요? 잘 되었네요. 좋은 일인 것 같으니 무슨 일인지는 묻지 않을게요. 다음 상담은 3일 뒤에 진행하겠습니다.”


병원을 들락거리기를 아홉 번째 되던 날, 한번 생각을 바꿔 보기로 했다. 부족한 덕분에 내가 성장할 기회를 계속 찾을 수 있었던 거라고, 지금까지 노력할 수 있었던 계기도 모두 ‘부족함' 덕분이라고.


이런 생각을 가만히 앉아 낙서로 남기기 시작했을 때가 이즈음이었다. 시간이 지나자 낙서가 문장이 되고, 한 편의 글이 됐다. 어디서 생겨났는지, 없던 자신감에 용기를 내어 여러 문학 공모전에 글을 공모해보기로 했다.




공모 사실조차 가물가물했을 즈음 문자가 한 통 도착했다. ‘축하합니다. OOO님께서는 올해 OO 공모전에 수상하셨습니다. 상금과 상패를 보내드려야 하니 회신 부탁드립니다.’


입상자 명단에 내 이름이 있다. 분명하다. 눈 씻고 다시 봐도 내 이름이다. 점심시간에도, 퇴근 후에도 계속 책만 읽는 시간이 많아지자 기분이 한결 차분해졌다. 마음도 가볍고, 내 삶이 왜 이런지 되돌아봤다. 그럴수록 선명해지는 건 아무도 나를 불행하게 만들지 않았다는 것. 그리고 혼자 자신을 불행하다고 생각했다는 점이다. 그렇게 시작된 혼자만의 인생의 질문과 답. 그 끝은 글쓰기로 이어진 셈이었다. 내용은 어린 아들을 바라보는 아버지의 마음을 그린 시였다.




며칠 전, 저녁 아홉 시를 조금 넘겼을 즈음 아버지께서 전화하셨다. 한참 전부터 전화 진동 소리는 들리는데, 책상 위를 잔뜩 차지한 서류 뭉치 사이에 깔려 있는 걸 간신히 찾았다.


평소 전화 한번 잘 안 하시는 분께서 오늘은 무슨 기분 좋은 일이 있으셨는지 옥구슬 목소리다. 들어보니, 아들의 공모전 당선 소식을 친척들에게 자랑하느라 서울 고모 댁에 다녀왔단다. 고모, 고모부께서도 칭찬을 잔뜩 했다는데, 한술 더 떠 우리 집안에 시인이 나왔다고 자랑까지 했다는 말에 얼굴이 뜨거웠다.


가족 중에서 유일하게 늘 문제아였던 내가, 새사람이 된 소식을 자랑하는 아버지 마음, 얼마나 신이 나셨을지. 아버지 마음이 조금은 이해됐다.


지금은 집 앞 단골 식당에 들러 어머니와 소주 한잔 하는 중이라는데, 이 순간만큼은 부모님께 '잘난 아들' 아들이 못 된다. 곧 있으면 나이 마흔인데도 늘 걱정뿐이라는 말에 밥 잘 먹고, 잘 지내고 있으니 술 조금만 드시고 들어가라는 말을 끝으로 통화를 끝냈다. 기분 좋은 날 두 분 앞에 앉아 술잔 채워 드리지 못한 게 아쉬운 마음을 들킬까 봐.




30년 전의 기억 속의 아버지는 술고래였다. 식사 중에도 식탁 위에 물, 컵엔 늘 술이 차 있었다. 쓴 물을 왜 그렇게 좋아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소주 맛이 달게 느껴지면 그때부터 어른이다.' 라던데 나는 아직 어른이 되려면 한참 멀었나 보다.


못난 아들의 이혼 소식을 말하려고 잠시 집에 들렀을 땐 식탁에 마주 보고 앉아 아무 말 없이 혼자 잔뜩 마셨다. 크게 혼이라도 내셨으면 좋으련만 '아들 선택을 존중해야지.'라고 하셨던 날, 비워진 잔에 미안하고 죄송한 마음을 가득 채워드렸다.




그로부터 며칠 뒤늦게 하신 전화 목소리가 아직도 생생하다. ‘아비가 부족해서 미안하다. 아들만큼은 더 좋은 삶을 살았어야 했는데, 물려줄 수 있는 것 하나 없어서 미안하다.’ 부모 마음 중에서 자식 앞에 서면 죄인이 된다는 기분이 이런 걸까. 어린 시절 우리 집은 왜 그렇게 가난하냐고 했던 내가 창피하고, 죄송하다.


시간이 약은 맞나 보다. 아프고, 미안했던 기억이 조금씩 고쳐지는 걸 보면. 곧 다가오는 명절, 고향 집에 내려가면 아버지 책상 위에 이 글을 올려두고 와야겠다. 감사한다는 말. 그동안 고생하셨다는 말 대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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