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 댁에는 한눈에 봐도 신기하게 생긴 모양의 유리병이 많다. 거실이며 베란다도 모자라, 어렸을 적 내가 지냈던 방도 병에게 점령당했다. 그뿐만이 아니다. 몇 달에 걸쳐 집에 가는데, 갈 때마다 느끼는 건 숫자가 점점 늘어난다는 거다. 가끔은 어떤 병이 생겼나 하고 구경하는 재미가 있긴 하지만, 잠결에 진열대의 다리에 발이 걸려 잠이 깨는 건 좀…….;
자세히 보면 병마다 밀봉날짜와 과 이름표가 있다. 사람으로 치자면 생년월일과 이름표다. ‘1980.12.31. 출근 기념’, ‘1985.5.1. 아들 태어난 기념’,‘1999. 3. 1. 30년 후의 오늘' 등등. 달력을 작게 오려서는 파란색 유성펜으로 이름을 써놓으셨다. 혹여 펜이 번질까, 테이프로 몇 겹을 부쳐놓은 것도 있다. 이렇게 해 놓으면, 절대 지워지지 않을 거라나.
지난주 일요일이었다. 그날도 현관문을 여는데 거실 바닥에 아버지가 앉아 계셨다. 어디서 뜯어오셨는지 신문 위에 이름 모를 나뭇가지가 한가득하다. ‘겨우살이’란다. 커다란 나무에 뿌리내려 기생하는 식물로, 겨울철 물에 달여 마시거나 술로 담가 마시면 몸에 좋다는 건 이미 아버지를 통해 알고 있었다. 약초 술 담그는 박사 학위가 있다면 이미 받고도 남을 지식 보유자가 아버지다.
문제는 분명 겨우살이로 담근 술이 이미 있다는 거다. 그것도 1990년도에 밀봉을 끝낸 술병.
"아버지, 그거 방에 있는데요? 또 담그세요?”
" ...”
평소에도 하실 말씀 외에는 본인 할 일 하는 사람이라, 그러려니 하고 방에 들어가 다른 건 없나 찾아보는데 못 보던 녀석이 하나 더 있다. 칡이다. 지방에 가셨다가 얻어온 건데 양이 많아 담갔다는 아버지의 말씀이다. 묻지도 않았는데, 칡술 근처로 가는 걸 보고는 미리 자랑하신 거다.
아버지의 말을 들어보면 칡도 여기저기 쓸 데가 많다. 생즙으로 만들어 마실 수도 있고 쓴 물을 빼다가 말리면 달달 한 맛이 나는데, 피곤할 때 엄지손가락만 한 걸 씹으면 금세 정신이 말짱해진단다. 공사장에서 일하시면서 쌓은 비결이라나. 예전에 한 번 여름에 입맛이 없고 더위에 지쳐 있다고 하니 지난겨울에 말려놓은 칡을 한 봉지 보내주셨었다. ‘하나씩 씹으면 피로 해소에 좋을 거다'라는 손편지 한 장과 함께.
내가 기억하는 아버지의 첫 담금주는 30년 전쯤이다. 주말 오후였을 거다. 그날도 어김없이 거실 한구석에 신문지를 펼치고는 알지 못하는 약재를 잔뜩 말렸다. 그게 신기해서 몇 개 주워 먹었다가 그날 밤늦게까지 설사를 했다. 호기심 때문에 받은 벌이다.
잠시 외출 나갔다가 들어오신 아버지는 미안함에 어쩔 줄 몰라 하던 기억이 난다. 근처에서 얼쩡거리던 나에게‘먹으면 안 된다.’라고 하셨지만, 호기심 많았던 내가 그걸 놓칠 리는 없었지 않겠는가.
기억 속 아버지의 담금주는 또 있었다. 친척 어르신이 보내주신 약재가 있었는데, 당시 어머니의 기침이 낫지 않아 보내온 거였다. 많은 양이다 보니 일부 술을 담갔다. 뚜껑에는 무슨 보물이라도 숨겨놓는 것처럼 비닐과 테이프를 덕지덕지 붙이고는 ‘엄마의 기침’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인데 한참 민간요법을 공부 중이셨던 아버지께서 나름 다음을 위해 준비해 놓은 거란다. 그 이름이 붙어 있는 병을 얼마 전에 개봉했다. 처음으로 뚜껑을 닫은 지 10년여만이다.
특별한 날은 아니었다. 평소와 똑같이 주말을 맞이해 아버지 댁을 찾았고, 그날은 이 약술을 꼭 마셔야겠다고 고집을 피우시는 바람에 못 이긴 척 따랐다. 달콤함과 쓴 내가 한 번에 뒤섞여 있는 혼돈의 맛이었다. 입에 쓴 게 건강에 좋다며 한 잔, 또 한 잔을 따라주시더니 옛 생각이 나셨나 보다.
그날 이 술을 담그고는 속이 상하셨단다. 형편이 넉넉하지 못해 아버지는 공사장으로, 어머니는 공장으로 출근해 재봉틀 일을 했다. 밤늦게까지 일감을 가져다가 거실 구석에서 재봉틀을 돌리는 아내의 모습에 미안함 때문에, 무능력한 자신 때문에.
그날 ‘엄마의 기침’은 단순한 술이 아니었다. 꼭 기억하고 싶은 한 남자의 눈물을 모아 놓은 것이었고, 중요한 기억의 순간마다 만들어놓은 예술품이었다. 아버지 어깨너머로 내 방 안까지 자리를 차지한 병이 몇 보였다. 아직 뜯지 못한 옛 추억이 한참인데, 몇 잔을 더 들이켜시고는 이내 안방으로 들어가셨다. 술잔엔 아직 술이 가득한데.
그날 이후 아버지에게 가는 날이 많아졌다. 승진했을 때, 직장 동료들과 사이가 좋지 않을 때, 여행을 출발하기 전, 다녀온 뒤에도 들렀고, 비가 오는 날이면 영상통화를 걸어 각자의 술 상위에서 ‘짠’을 외쳤다.
어렸을 때만 하더라도 술 취한 아버지가 싫었는데, 이제는 아들은 못이겠다며 먼저 일어나시는 아버지의 뒷모습을 보면 아직도 집안 가득한 담금주가 걱정이다. 오래오래 술잔을 부딪쳐 드려야 되는데, 아버지의 못다 한 말을 더 들어야 하는데, 시간이 너무 빠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