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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달리 Jul 11. 2024

라디오를 듣다 보면(상)

짝사랑 라디오


고 3 수능 준비생임에도 불구하고 나는 라디오에 빠져 있었다. 그때만 하더라도 반에 핸드폰을 가지고 있는 친구는 한 명 내지 두 명, 그 외 손바닥보다 작은 mp3를 가지고 다니는 경우도 별로 없었다. 값이 비싼 탓일 수도 있었지만 그땐 그랬다. 야간 자율 학습 시간 창가에 라디오를 얹어 두고 듣는 고정 주파수의 음악이 더 인기 있던 시절이었다.


제대로 알아듣지도 못하는 외국 팝송을 들으며 흥얼거리던 때였다. 티브이나 컴퓨터 게임에서는 느낄 수 없는 일종의 상상의 사치랄까. 적어도 그때의 나에게만큼은 최고의 놀이였을 터다.


중학교 때 처음으로 라디오를 듣기 시작했다. 첫사랑을 시작했을 때였다. 같은 학원을 다니는 여자 사람 친구의 대화에서 시작한 일이었다. 수업이 끝나고 쉬는 시간 책상 하나를 사이에 두고는, 뒤로 돌아 앉아 나와 여사친, 그 옆 짝꿍 셋이 수다를 떨었다.


'혹시 정지영의 스위트 뮤직 박스라고 알아?'

'응? 정지영? 그게 누군데?, 가수야?'

'얼마 전부터 라디오를 듣기 시작했는데 밤 열 시 넘어서 방송되는 프로그램이야. 정지영은 방송 디제이고'

'아, 그거? 집에 라디오가 있는 것 같기는 했는데 들어보지는 않았어. 거실에 티브이가 있어서 부모님 주무실 때도 보고는 했거든. '

'그럼 한 번 들어봐'


집에 돌아오자마자 아버지께서 가끔 틀어놓으시던 오래된 라디오를 찾아냈다. 며칠 전 주말에도 책꽂이에서 본 기억이 있어 보자마자 전원을 켰다. '치지직'. '주파수, 주파수, 아?! 주파수가 몇 인지 물어보질 않았잖아!'

거실 컴퓨터 앞에 앉아 '야후'를 켰다. 의자를 당겨 앉고는 검색창에 '정지영의 스위트 뮤직 박스'를 입력했다.


'107.7, 밤 열 두 시.'  '이 시간에 라디오 틀어놓고 있으면 분명히 한 소리 들을 텐데...' 방법은 있었다. 이어폰을 귀에 꽂고 들으면 될 일이었다.

그날 이후 나에게 라디오는 더 이상의 라디오가 아니었다. 짝사랑과 대화할 수 있는 연결고리였고 상대방의 마음을 몰래 들여다보는 작은 구멍이기도 했다.


학원 수업은 머리에 들어오지 않았다. 대신 어떻게든 이야깃거리를 만들기 위해 상상을 준비하는 시간이었다. 10여분의 쉬는 시간이 짧았다. 고갤 돌려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금방 선생님이 오셨고 나는 그 녀의 뒤만 볼 수밖에 없었다.


라디오의 힘을 빌려 고백을 해볼까도 생각했다. 그때는 라디오 방송 디제이들이 엽서와 손 편지를 많이 받던 때였다. 그중 20대 남녀가 많았는데, 나 역시 그들의 이야기에 귀를 세워 들으며 밤 잠을 설친 날이 많았다. 대부분 상대방을 향한 내 감정이 들킬까 표현하지 못한 채 속으로 만 앓고 있었다. 첫사랑이자, 태어나 처음으로 겪는 짝사랑일터였다. 무조건 적으로 사랑을 주고받는 가족 외에 처음으로 느끼는 감정이었을 테니까.


나 역시 사연을 보내 볼까 했다가 포기했다. 혹시라도 같은 주파수 속에 머물던 상대방이 이름 모르는 사람의 이야기를 듣고 반추 끝에 나를 추정할까 두려웠기 때문. 더군다나 이런 사례는 종종 있었다고 했다. 자신의 일은 아닌 것처럼 슬쩍 돌려서는 사연을 적어 보냈다가 상대방이 눈치를 채서는 도리어 거리가 멀어졌다는.

결국 중학교 시절의 라디오와 첫사랑은 짝사랑으로 고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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