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달째 일요일 아침마다 집 근처 공원을 달렸다. 성경책 들고 다니는 사람을 많이 봤다. 나 역시 달리기에 의지하며 위로받고 있었다. 지난주엔 달리기를 끝내고 걷는데 공원 벽을 따라 걸린 시화를 봤다. 몇 학년 몇 반이라 쓰여 있는 걸 봐서 초등학생의 작품인 걸 단번에 알아챘다. 지명을 제목으로 지은 글도 있었고 자신의 반려견을 주제로 쓴 시도 있었다. 걸으며 한 장, 한 장 구경하는데 나 어린 시절이 생각났다.
내가 글짓기에 관심을 처음으로 갖게 된 건 열 살 무렵이었다. 워낙 내성적인 성격 탓에 친구에게 먼저 다가서지 못했다. 그 시간 만큼 책을 읽었고 담임선생님께서 숙제를 검사하다 내가 쓴 시를 읽고 ‘작가’ ‘시인’이라는 존재를 처음으로 알려줬다. 그땐 그 사람들이 무엇을 하는 사람인지 몰랐다. 숙제를 어떻게 해야 선생님께 칭찬받을 수 있을지가 우선이었다.
아이에게 대가 없이 주는 선물 만큼이나 중요한 일이 ‘칭찬’과 ‘인정’이다. 시간 지나 어른이 된 나였지만 삼십 대의 마지막 가을을 보낼 때까지도 이 두 감정에 목말라 있었다. 그러다 옷장에서 겨울옷을 꺼내면서 문득 ‘남이 아니라 내가 그렇게 느끼기만 하면 되지 않는가?’ 하는 의문이 생겼다. 매번 ‘잘해야 한다.’라는 강박 대신 ‘성공도 실패도 모두 내 몫’이라는 넓은 마음 먹을 수 있다면 그때부터가 어른의 의미를 깨닫는 과정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을 의미하는 ‘人’(인)은 한 사람이 두 발로 곧게 서 있는 모습을 형상화했다고 한다. 그만큼 남에게 의지하기보다 스스로 삶을 개척하는 자세. 그게 사람의 본 모습이자 어른이었다.
다음 달이면 두 번째 스무 살이다. 칭찬과 인정으로부터 멀리 떨어지기로 했다. 나이 먹는 사실에 가슴 쓰라리지만 ‘두 번째 삶’을 시작한다는 생각만 하기로 했다. 외부에 부는 바람에 흔들리지 않을 나이. 삶의 진리를 하나씩 깨우쳐 시작하기 좋은 ‘0’살의 나이.
글쓰기를 본격적으로 시작한 건 올해로 2년째다. 신문사에 칼럼을, 공모전에서 몇 번의 입상 경력이 나의 이름 뒤에 경력으로 붙었다. 나를 모르는 사람들에게 설명하는 정보일 뿐이지만 어쩐지 앞서 흘러간 시간보다 삶에 대한 진지함을 스스로 새긴 듯해 머쓱하다.
지금까지 만난 수많은 선택지 앞에서의 망설임과 실패를 글쓰기를 통해 돌아봤다. 시와 일기, 수필 속에서 본 길은 의지가 앞섰고, 실수와 후회 가득하였다.
글을 쓰려거든 자리에 앉아 있는 시간보다 몸으로 부딪치며 겪는 실패와 성공이 많아야 한다고 들었다. 우울과 방황이 반복된 20대, 알코올 중독, 공황과 부적응을 치료하기 위해 보내던 30대를 원망도 많이 했다. 그런데도 그 시기를 거쳐 무사히 도착했다. 낡지만 지금의 시간이 놀라울 따름이다. 끝에 글쓰기가 내 곁을 지키고 있었다.
아이의 성장은 물리적이다. 유예하며 너그럽다. 무엇을 원하는지, 어떤 선택을 해야 할지 고민하며 실수에도 자연스럽다. 하지만 어른은 삶이 시작된다. 자신의 선택을 믿고 밀려드는 감정과 먼지까지도 털어내며 묵묵히 걸어야 했다. 당연한 일이다. 과거의 오만함을 깨닫는 순간마다 책임이라는 말을 배우니까. 슬프게도 긍정보다 그렇지 않은 신호에서 더 많은 깨달음을 얻었음이 부끄럽다.
열 살의 나에게 글쓰기가 무엇이냐 물었을 땐 ‘칭찬을 받기 위한 일’이었다는 대답이 정답일 것이고 지금은 ‘자신을 칭찬하는 과정’이라고 말한다. 막막함과 답답함의 굴레 속에서도 끈질기게 이 일을 반복하는 이유다. 또 마흔인 나에게 묻는다면 조금 더 ‘신중한 시작’을 알리는 신호가 되고 싶다. 무엇이든 이룰 수 있고 꿈많은 두 번째 스무 살이니까.
당연히 그럴 일이다. 이미 좌절과 우울만으로는 삶을 살 수 없다는 걸 알았고, 얻었다면 언제나 잃을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또 알고 있지 않은가. 유약한 어린 시절의 나뿐만은 아닐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