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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현기 Dec 18. 2024

나만의 보물 만들기

방 한쪽을 차지하고 있던 책상을 거실로 옮겼다. 덕분에 침대 하나 남아 공간이 두 배는 넓어 졌다. 내가 사는 곳은 흔히 말하는 1.5실. 방 하나에 거실 겸 주방이 있는 구조다.


작년 이곳으로 이사 오면서 잔뜩 쌓아두었던 책을 폐지로 팔았다. 언젠간 읽겠지 하며 제목에 이끌려 충동 구매 한 책도 있었고, 서평을 청탁받은 책도 있었다. 지난 2년 이상을 그렇게 지내다 보니 원룸은 좁았다. 은행의 힘을 빌려서라도 더 넓은 곳으로 오게 된 이유였다. 그런데도 책이 많았다. 한 번 더 이사하면 비워낼 수 있을까.


지난여름 본가에 들렀다가 내 방 책꽂이에 있는 책을 모조리 꺼내 가져왔다. 틈틈이 정리한 덕분에 많지는 않았지만 지금 있는 책들과 합치니 족히 백 권은 넘었다. 비우기를 반복해도 넘치는 이유를 모르니 답답하다.


책 사이에서 삐져나온 노트 한 권이 눈에 들어왔다. 색이 바랬고 군데군데 찢어지기까지 했다. 어린 시절의 나의 일기장이었다. 나는 낡은 글이 좋았다. 내 곁엔 낡은 물건이 넘쳐났다.


삶은 의지와 우연이 만들어 내는 조화다. 어떻게든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삶을 만들어 가겠다며 다짐하다가도 우연히 좋은 기회가 생기면 그쪽으로 노선을 튼다. 나에게 낡은 책과 글을 모으는 시간이 그랬다.


30대에 방황을 오래 했다. 듣기 좋게 경험이라 하고 싶지만 틀림없는 일탈이었다. 삶에 기대했다. 사람에게 기대했다. 그러다 원하는 만큼의 결과를 얻지 못했을 땐 실패와 불행이라고 여겼다. 삶은 고쳐 쓸 수는 없지만 남겨둔 기록으로 그때의 내 삶을 재해석할 수는 있었다. 그건 내가 겪은 성장통이었을 뿐이었다.


보물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내가 아끼다 보면 명품이 되고 세상에 하나뿐인 보물이 된다. 방황의 끝에서 만난 책과 글이 모두가 보물이다. 그때의 내가 남겨둔 흔적은 모두 추억이 됐다.


보물에는 걸맞은 설화가 있기 마련이다. 사람들은 보물도 보물이지만 관련되어 알려지지 않는 이야기에도 관심이 많다. 예를 들어 어느 유명 화가의 귀 없는 자화상이 그려지기까지의 이야기라던가, 전쟁의 포화로 자신의 고향이 피해당한 모습을 그려낸 배경이라던지 하는.


나의 낡은 흔적을 되돌아 가다 보면 이야깃거리가 많다. 그리고 반짝반짝 빛난다. 눈물뿐이었던 날이 오늘의 나에겐 위로가 된다.


그런 마음으로 오늘도 낡기 위해 글을 써놓는다. 아직은 서툰 삶이지만 이 과정이 지나면 내일의 나에게 어떤 힘이 될 수 있을지 충분히 경험해 봤으니까. 이제는 그걸 알기에 나의 보물 같은 하루를 기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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