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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rianH Apr 03. 2020

두울. 느림의 맛

[포차 훅] 코로나로 멈춰버린 학기를 즐기는 법

  2020년이 밝은지도 어느새 100일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

미미하게 시작했던 코로나 19 바이러스가 전 세계에 창궐하면서 바야흐로 전 세계의 보건사에 새 역사를 쓰는 나날들이 기약 없이 늘어지고 있다.


  말로만 듣던 재택근무, 유급휴일, 원격수업들을 여기저기 채택하면서 ‘정말로 정보화 시대에 살고 있구나’, ‘인터넷으로 이제 못 할 것이 없어지고 있다’는 사실이 피부로 와 닿는다.사람들은 마치 원래부터 그랬다는 듯 변화에 적응해서 살아가고 있다. 재택근무와 자가격리로 집에서 시간을 보내는 시간이 많아지면서 살이 확 찐 사람을 일컫는 ‘확 찐자’라는 신조어가 생기고 처음의 공포도 익숙해졌는지 이제 잠잠하게 본인들의 자리에서 새로운 즐거움을 속속들이 찾아내고 있다.


  언젠가 한 영화에서 기술의 발달이 사람들을 게으르게 만들어 의자에 붙어있는 모니터를 보며 전동의자를 끌고 다니면서 뚱뚱하게 변했던 영화를 본 적이 있다. 온갖 음식 맛이 나는 음료수를 들고 다니면서 끼니를 대신하고 사람들은 걷는 법을 잊고 생각하는 법을 잊고 인생에 의문을 갖는 법 마저 잊어버리고 만다. 물론 지금의 상황이 꼭 그렇다고는 할 수 없지만 이번 사태를 겪으면서 아날로그를 더 사랑하는 나 조차도 전자 기계와 넷플릭스의 늪에서 허우적대고 있다. 인터넷이 조금만 느리면 무언가 잘못된 건 아닌지 전전긍긍하고 몇 초를 참지 못해서 새로고침 버튼을 기다리던 시간보다 더 많이 누른다.


  이런 마음들이 우리의 의식을 방해한다고 생각한다. 벌써 수십 년째 한국인들의 특성이 되어버린 ‘빨리빨리’가 모든 일상에서 가장 좋은 방법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래서 ‘느림의 맛’이라는 단어를 떠올렸을 때 음식을 먹는 속도나 요리를 하는 속도보다 그 일정 자체의 속도를 가장 먼저 떠올렸다. 위치는 천호동 암사역에 있는 ‘포차 훅’. 일전에 지인의 소개로 한 번 가보고는 꼭 다시 와야겠다고 생각했지만 일상에 치이고 현실에 치이다 보니 서울 근교에 사는 필자에게 서울시에 있는 맛집을 찾아가는 것조차 여행처럼 미뤄져 버렸다. 이왕 밖으로 나가는 일정이 다 취소된 거 큰 맘먹고 나섰다.


  마스크를 단단히 착용하고 가방에는 잊지 않고 손 세정제를 챙겼다. 넉넉잡아 왕복 한 시간 반 정도의 거리를 굳게 마음먹고 출발해야 한다는 사실이 조금 쓰리긴 했지만 출발부터 ‘느림의 맛’을 느껴보기로 했다. 늘 지나다니던 길과 다른 창 밖의 풍경은 마치 어릴 적 처음 이사 갔던 동네에서 걸어 집까지 걸어 10분 정도 거리를 헤매고 헤매어서 도착했을 때의 낯선 그것과 같았다. 나는 26년이나 살았지만 아직 한반도의 작은 서울시를 건너는 것에서 조차 작은 두근거림을 느낀다. 그것이 설렘 일지, 익숙함의 울타리를 벗어나는 두려움 일지 모르겠지만.


  그렇게 낯선 시간들을 만끽하고 ‘포차 훅’에 들어섰다. 이 곳의 인테리어는 사장님의 취향 그 자체다. 인기 애니메이션 ‘원피스’의 굿즈들로 가게를 가득 채웠다. 나도 10년 넘게 연재되고 있는 이 만화의 팬으로서 이 가게를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애니메이션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꿈꿔 본 적 있는 피규어로 가득 찬 장식장과 여러 가지 인테리어 소품들. 실제로 그 꿈을 이루기까지는 많은 시간과 돈이 필요하지만 하나하나 굿즈들을 모아가면서 느끼는 성취감은 해본 사람들 만이 알 수 있다. 이 장소는 이미 그 자체로 소소한 꿈을 이뤄가는 느림의 맛을 내고 있었다.


  포차 훅의 안주들은 퓨전음식이다. 지극히 개인적인 취향에 따라서 알리오 올리오와 닭발&주먹밥을 시켰다. 알리오 올리오는 올리브유에 편 마늘의 향을 입히면서 약한 불에 지긋이 요리해야 한다. 파스타면을 투하하고 나서는 면수를 부어주면서 계속 약한 불에 기름과 전분을 섞어주면서 소스가 잘 어우러지도록 저어줘야 한다. 여기서 급한 마음에 마늘을 센 불에 익히면 마늘이 다 타버려서 파스타에서 쓴 맛이 나게 되고, 기름과 면수를 중화시켜 줄 때에도 마찬가지로 센 불로 조리하게 되면 면이 퍼지고 오히려 기름과 면수가 따로 놀게 된다. 조급한 마음에 시간에 쫓겨 조리하다간 제대로 된 맛을 잡기 힘들다. 조리과정 자체는 엄청나게 간단하지만 알리오 올리오는 적절한 인내심과 타이밍을 요구한다. 진하고 깊은 맛을 내기 위해서는 천천히 음식과 상호작용해야 한다.


  이런 음식의 과정들을 생각하다 보면 어른이 되지 못한 ‘어른이’로 삶을 생각하게 되는 때가 있다. 눈앞의 성과와 짧은 이익을 보고 움직였던 몇몇 일들을 떠오르고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도록 과정을 곱씹는 밥을 배우는 중이다. 사람과의 관계에서도 순간의 뜨거움으로 겉에 입히는 향이 아닌 속부터 차오르는 관계들이 기억에 남는 법이다. 앞만 보고 달릴 때는 전혀 보이지 않던 것들이 비로소 ‘느림의 맛’에서 느껴진다. 미팅에 쫓기고 퇴근시간 교통 인파에 쫓기는 일상을 제쳐두고 술 한잔과 맛있는 안주를 곁들이면서 과거를 읊어대는 지금 이 순간이 너무 소중하다. 날이면 날마다 느낄 수 없는 ‘느림의 맛’이기에 더 음미할 수 있다. 필자의 ‘느림의 맛’은 음식의 맛이 아니다. 음식에는 삶이 있다. 인생이 악장과 같다면 템포 조절은 필수다. 오늘 먼 귀갓길이 어떤 맛일지 궁금하다.

@글/ 사진 최 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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