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빠르크] 퇴근 후, 엄마 표 밥상으로 채우다
직장인들의 위장은 늘 텅 비어있다.
아침은 '당연히 피곤하니까' 30분의 잠과 맞바꾼다.
점심은 '빨리 들어가야 하니' 원하는 것을 먹는 경우가 극히 드물다.
저녁은 '귀찮아서' 안 먹거나, 어제 시켜먹고 남은 거 덥혀 먹거나, 새로 시켜 먹게 된다.
주말도 크게 다르진 않다. 특별한 약속이 없으면 비슷한 전개가 이어진다.
아, 조금 늦게 일어나 점심을 시켜먹거나 라면으로 떼우는 것으로 달라지긴 한다.
출렁거리는 뱃살과 하루가 다르게 늘어나는 체중계의 숫자를 보면서, 악순환을 끊어야겠다는 결심을 해본다. 뭘 좀 해먹어볼까? 구독하는 크리에이터가 오늘 올린 홈쿠킹 레시피가 탐스럽다.
역시나 귀찮다. 재료도 사와야 되고, 잘 다듬어야 되고 조리해야 된다고 한다. 10분이면 된다고 하지만 계란후라이조차 태워먹는 내게는 30분은 걸릴 것 같다. 신경 쓸 게 가뜩이나 많은 내 세상에 들여오기 어렵고 낯설어서 오늘은 포기. 세상 엄마표 밥상의 위대함을 깨닫는다. 부족함을 채우기 위해, 우리는 매일 같이 험난한 여정을 보내는데 그 끝이 아이러니하게도 공복이다.
그래서 오늘 무모한 도전을 해보려고 한다.
금요일이 아직 남아 있고 일주일의 피로가 제일 누적될 목요일 저녁, 집 대신 따뜻한 집밥 한 끼를 정갈하게 차려줄 수 있는 한강진역의 '빠르크'로 향한다.
한강진역에서 15분 정도 걸어가면 리움미술관 뒷골목으로 이어지는 짧은 언덕을 만나게 된다.
언덕길 안쪽에 고급 스시집부터, 인테리어만 봐도 군침이 돌 법한 유명 파스타 하우스나 피자집들이 줄줄이 자리잡고 있다. 쌀의 흔적이라고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을 것 같은 곳에서, 조금 더 높은 언덕배기에 위치한 '빠르크'를 만날 수 있다.
언덕의 높음을 고스란히 반영한 나무 계단을 타고 들어가면, 백열등 몇 개와 베이지식 벽, 원목에 가까운 나무 책상들로 조촐하게 꾸민 인테리어의 빠르크의 안으로 입성할 수 있다.
빠르크의 내부는 벽 하나를 사이에 두고 바깥 공기를 시원하게 즐길 수 있는 개인 손님용 공간과, 얼핏 봐도 회식용 테이블들이 가득한 안쪽 단체 손님용 공간으로 구분되어 있다.
7년이란 세월을 고스란히 반영하듯 벽은 그을음과 손때, 의자들도 상당히 오래돼 보여 우리 집의 가구들과 크게 다르지 않아 보였다. 집에 온 느낌이다. 음식도 부디 그런 즐거운 상상을 실현에 옮겨주기를.
빠르크는 기본적으로 한 상 차림을 제공한다.
채소, 고기 혹은 생선 등으로 구성된 메인 메뉴 하나를 선택하면 밥과 국, 기본 반찬 세 종류를 제공하여 한 상을 완성하는 방식이다. 부족하면 감자전, 명란계란말이 같은 사이드 디쉬를 추가하여 상을 조금 더 화려하게 만들 수 있는 정도? 밥도 일반 쌀밥과 현미밥 중에 선택할 수 있어 더 건강한 식사를 원하는 이들에게 폭넓은 선택지를 제공한다.
오늘의 저녁은 '7나물 한 그릇'과 '차돌박이구이 & 부추냉채', 엄마가 고기만 먹으면 안 된다고 함께 내오던 야채 몇 종류를 그대로 재현해보았다.
(점심 때는 조금 더 다양한 메뉴들을 점심 한 상으로 단촐하게 차려준다. 그 중에서도 특히 유명한 메뉴가 수란 & 통베이컨이 들어간 묵은지 볶음밥. 한 끼 점심으로 적합한 가격대와 푸짐함을 자랑하니 이태원 근방의 이국적 요리에 지친 이들에게 훌륭한 해결책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오이소박이, 메추리알, 고사리나물로 구성되어 있는 세 종류의 밑반찬은 정갈하고 심심했다. 김치도 덜 맵고, 함께 나온 콩나물국은 심심하고, 나물들도 특별한 양념을 하지 않은 채 나오는 것이 완벽한 집밥 st.
맛과 타협을 하지 않기 위해 자제한 흔적이 역력했다. 현미밥 한 숟가락 위에 얹어먹는 나물 한 입에서부터 긴장이 확 풀린다. 그래, 이건 집밥이 맞다.
부드러운 차돌박이에 풋고추 등을 잘게 썰어서 기름을 잡아준 구이도 과하지 않은 집의 맛이다. 특이하게 고추냉이를 함께 주는데, 고기 위에 조금 얹어서 함께 먹어보니 알싸한 끝맛이 느끼함을 잡아준다.
한남동의 여유로운 풍경을 바라볼 수 있도록 활짝 열어둔 미리 테라스에는 할머니가 키우실 법한 몇몇 식물들이 아직 꽃피우지 않은 채 무럭무럭 자라고 있었다. 푸짐한 한 상을 항상 받을 수 있었던 외할머니 댁, 코로나가 좀 진정되면 한번 들려야지.
오늘도 한 상을 깔끔하게 비우고 왔다. 기분 좋게 배부르다. 위장이 채워짐을 넘어선 뿌듯함, 피곤함으로 가득한 몸을 부드럽게 녹이는 채움의 맛. 세상에 맛있는 음식들이 많음에도 집밥이 항상 그리운 대상인 게 이것 때문이지 않을까. 이번 주에는 집에 있는 재료들로 주말에 집밥을 좀 해먹거나, 점심을 먹으러 여길 다시 들려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