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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rianH Nov 08. 2020

저당 잡힌 게 너무 많다

미래의 전당포에 맡겨놓은 맛과 쉼터 이야기들

아침저녁 날이 많이 쌀쌀해졌다. 

달력도 어느덧 마지막 페이지를 향해 힘차게 나아가고, 옷장 속의 옷가지들이 많이 두꺼워졌다. 


겨울이다. 

많은 것을 잠시 빼앗는 계절. 

얼어붙을 듯한 추위 속에서 잠시 한 숨 돌리고, 모으고, 기다리는 것을 가르쳐주는 계절.

끝날듯하지 않은 기다림 속에서, 당연시했던 것들의 소중함을 일깨워주는 계절.


올해는 내내 겨울이었다.

시간과 공간의 방에 갇힌 이처럼 기약 없는 기다림들의 반복. 

위태롭기 짝이 없었던 일상 속에서 다른 장소, 감정, 사람은 위험요소 그 자체였다.

사람들의 시선조차 해석하고 눈치 봐야 했던 무서운 겨울이 일 년 내내 마음을 얼어붙게 하고, 많은 것을 상실하게 만들었다. 정말 추운 겨울이었다.


그 지독한 겨울이 조금 풀리려고 한다.

혼자 탄 것처럼 고요했던 출퇴근길에 많은 목소리가 들린다.

거리에서도, 가게에서도 한숨소리 대신 웃음소리가 조금씩이나마 들려오기 시작한다.  

아이들만 시끄러웠던 동네 놀이터는 엄마 아빠들의 사랑방이 되어가고 있다.

얼굴 못 봐서 잊어버리겠다는 카톡이 끊이지 않고, 물음표로 가득한 답변 대신 느낌표로 가득한 답장을 날리기 시작했다. 그래, 얼굴 잊어버리기 전에 이제는 한번 보자.


새의 첫 날갯짓처럼 조심스럽다.

아직도 겨울은 맹위를 떨치고 있고, 세상은 얼어붙어 있기에 밖으로 떼는 발걸음은 조심스럽기 짝이 없다. QR코드도 열심히 체크하고, 소독제 꼭 한번 바르고 마스크는 최대한 늦게 벗는다.

그래도 먹으러, 쉬러 가는 길에는 수많은 기억들이 마중 나와 다시 시작한 날갯짓을 환영해준다. 첫 혼술을 함께했던 노포, 처음 떠났던 혼자만의 안식처, 고향 생각이 듬뿍 나게 했던 비스트로, 큰 꿈을 꾸고 외쳤던 산 정상이 다시 눈앞에 보이기 시작한다. 


우리는 항상 너무 많은 것들을 미래에 맡겨놓곤 한다.

지금 나의 모습에 의지하기에는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는 집값도 무섭고, 언제까지 유지될지 알 수 없는 나의 경쟁력도 두려워서인지 숨겨진 맛집 한 곳, 바에서의 술 한 잔, 머물기만 해도 몸과 마음이 치유될 것 같은 쉼터들까지 나중으로 미뤄지곤 했다. 미래에는 다 할 수 있을 것이라는 착각에 사로잡힌 채로.

그러나 세상은 알 수 없는 것들의 연속이다. 올해 새해만 하더라도 눈에 보이지도 않는 바이러스가 우리의 삶을 지배하게 될 거라고 상상치도 못했던 것을 떠올려보면 바로 실감이 난다.  


맡겨놓았던 것들을 찾아야겠다.  

오늘의 식사가 즐겁지 않은데, 미래의 식사가 더 즐거워질 수 있을까? 

오늘 쐬고 오는 공기가 미세먼지처럼 탁하고 무거운데, 내일의 공기는 더 맑아질까?

미래에 나 자신을 저당 잡히지 않기로 했다.

오늘 누리는 맛과 휴식이 미래의 나를 더 행복하게 할 테니, 맡겨놓은 맛과 쉼터들을 꺼내야겠다. 

저금통을 깨는 아이처럼 호기심과 설렘에 벌써 마음속의 겨울이 걷히는 듯하다.


얼마나 모았을까, 그리고 이걸로 어디를 갈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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