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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rianH Jan 24. 2021

엄마, 카레 그만 바꿔도 돼요

잃어버린 우리집 인도카레의 맛을 찾아서

평온한 주말 아침, 엄마표 음식에 대한 작은 반란이 시작되었다.

'내가 아는 카레'로 돌아가기 위한 위대한 여정의 시작.

엄마, 카레 그만 바꿔도 돼요. 진짜 카레를 모셔왔으니.


어릴 적, 내게 카레는 소울푸드였다.

군침도는 풍미와 식감, 진한 노란색이 만들어내는 따뜻함과 평온한 느낌.

건강한 재료들이 많이 들어갔다는 안도감. 

무엇보다 처음 먹을 때보다 다음 날 먹는 게 더 맛있는 색다른 매력까지.

기대감과 따스함에 빠져 허겁지겁 먹는 내 모습에 흐뭇해하는 엄마의 미소를 보면, 한 그릇 더 달라고 자연스럽게 말할 수 있었던 상부상조적인 음식이었다. 


수능, 입대, 면접 등 각종 대소사와 함께했던 카레 왕국이 흔들리기 시작한 계기는 뜻밖에도 엄마의 정성이었다. 

자식에게 더 맛있고 건강한 요리를 해주고자 하는 마음, 그래서 더 좋은 재료를 넣고 싶은 정성이 아이러니하게도 오리지널 카레의 급격한 변신을 불러왔다. 그리고 초심을 잃은 카레는 더 이상 카레가 아닌, 정체불명의 스튜가 되어 집의 평온을 깨뜨리기 시작했다.

갑자기 둥둥 떠다니는 브로콜리, 뜻밖의 브라질너트, 갈 길을 잃은 피망 친구들. 좋은 것만 먹이고 싶은 어머니의 마음이 고스란히 녹아있는 카레의 카피캣들이 30년 동안 마음속에 형성되어온 카레의 본모습에 스크래치를 긋고 있었다. 

'엄마, 요건 아닌 거 같아'


하지만 사람은 쉽게 바뀌지 않는다. 

30년 동안 확신에 차 있었던 레시피에 대한 의견이면 더 그렇다. 건강한 게 최고시란다. 

'아니 그렇게만 넣어가지고 뭘 먹어, 이런 것들도 들어가야 건강한 거야!'

건강 우선주의와 맛 우선주의라는 양립할 수 없는 전제 사이에 한 가정 카레의 운명을 걸고 이렇게 칼과 불 앞에 서 있게 되었다.


소울푸드의 맛과 추억을 되돌리고자 하는 내가 오늘 사용할 필살기는 버터카레. 

가람 마살라 같은 복잡한 향신료를 사용하지 않아도, 값비싼 기 버터까지 굳이 넣지 않아도 적당히 인도에 다녀온 느낌을 표현할 수 있는 녀석이다.

버터카레의 핵심은 '적당히'. 2인분 기준 고기 300g, 양파 한 개 등의 표준 레시피가 있긴 하지만, 숫하게 카레를 먹어본 이라면 재료의 양에 따라 맛을 바꿀 수 있는 경지에 도달하게 된다. 서당개도 30년 카레를 먹어봤으니 그 정도쯤이야. 

오늘은 2인분만 할 거니까, 양파는 한 개 정도면 충분하다. 잘게 썰고 잠시 다른 그릇에 옮겨둔다.

인도 카레에 주로 쓰는 닭가슴살 대신, 조금 더 건강한 닭가슴살을 작은 큐브 모양으로 썰어둔다. 거기에 고운 고춧가루, 뚜기산 카레가루, 플레인 요거트, 레몬즙 한 스푼에 다진 마늘 1.5스푼을 넣어 고루 섞으면 주황색에 가까운 빨간 옷을 예쁘게 입는다. 


맛있는 음식은 정직하다.  

골고루 섞어야 각종 향신료들이 고기에 잘 배어 카레의 맛에 편차가 생기지 않는다.

섞고 바로 구울 수도 있지만, 양념이 더 잘 배고 고기의 힘이 풀리도록 랩을 씌워 한 시간 정도 숙성시켜주기로 한다. 

재료만 섞었을 뿐인데, 벌써 은은한 카레향이 살짝 매콤하게 올라오기 시작한다. 느낌이 좋다.


숙성이 다 끝난 고기를 냉장고에서 꺼냈다.

언제 끝나냐는 엄마의 따사로운 눈빛이 등 뒤에서 느껴져, 숨 돌릴 틈 없이 바로 굽기 시작한다. 

올리브유를 조금 얹고, 중불로 올려놓고, 팬에서 열기가 올라올 때쯤 적당히 굽는다.

핑크색 속살이 하얗게 바뀌고, 고기와 양념 냄새가 올라오려고 할 때쯤 다른 접시에 잠시 옮겨둔다.


양념들의 향이 그대로 배어있는 팬 안에 양파와, 버터 두 스푼 정도를 넣는다. 녹는 버터기름으로 팬 안에 모든 녀석들을 흡수해가며 양파를 볶는다. 새로 산 요거트 뚜껑에 묻은 요거트처럼, 마지막 남아있는 누룽지처럼 뭐든지 마지막에 남은 것들이 제일 맛있다.  

버터의 향이 스며들어 양파가 노랗게 익어가기 시작할 즈음, 고춧가루, 카레가루, 플레인 요거트가 같은 비율로 다시 등판한다. 거기에 물을 넣고 생크림, 케첩 세 스푼 정도를 넣어 약불에 솔솔 끓이면 베이스 수프 완성.


슬슬 뒤통수가 많이 따갑다. 집안 식구들 밥도 못하고, 확신도 없는 음식을 기다리며 답답해하는 엄마의 따가운 눈길이 느껴진다. 

하지만 이런 압박감에 굴하는 순간 혁명은 실패로 돌아간다. 

'곧 끝나요'라는 전형적인 회피용 멘트와 함께, 마지막까지 대기하고 있던 고기 전사들을 투입하면 슬슬 인도에서만 날 법한 현지 냄새가 올라오기 시작한다. 이제부터 30분 정도만 버티면 된다. 

빨리 졸이기 위해 뚜껑을 열고 끓여주고, 완벽한 맛을 위한 최종 보정을 한차례 가해준다. 덜 걸쭉하면 카레가루를, 덜 매콤하다 싶으면 고춧가루를 더 넣는다. 

육개장 같은 느낌의 빨간색 국물이 걸쭉하게 떨어지면 마침내 완성.


모든 설득의 절차에는 플레이팅도 포함된다.

밥 위에 그냥 끼얹지 않고 오랜만에 조금 재주를 부려본다. 설설 밥을 퍼 그릇에 반 정도만 담는다. 적당히 식힌 카레를 빈 쪽에 담아주고, 마지막으로 파슬리 가루를 송송 뿌려준다. 

'다 됐어요 엄마, 드셔 보세요'

역성혁명은 과연 성공할 것인가.



'오, 괜찮네? 이젠 카레는 네가 하면 되겠다'


성공이다. 5년간 잃어왔던 카레에 대한 주권을 되찾은 순간이다.

드디어 카레에 브로콜리나, 브라질너트나 기타 온갖 상상 속의 재료들이 들어갈 일이 없을 것이다.

적어도 카레 먹는 날만큼은 이제 마음의 평온을 다시 되찾을 수 있을 것 같다.




무언가 언론플레이에 말려든 기분도 든다.

하지만 뭔들 어떠한가, 카레는 맛있고 재료도 비싸지 않다. 앞으로 즐겁게 집에서 먹을 수 있는 음식이 하나 다시 생겼으니 누이 좋고 매부 좋고다.

엄마표 밥상의 초심을 되찾을 수 있도록, 이제는 반란을 조금 더 자주 일으켜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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