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른 무렵, 나는 친구들이 우스갯소리로 말하는 소위 ‘계란 한 판’이 되었으니, 지금쯤 결혼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평생 비혼 주의가 아니라면 지금이 적당한 때이고, 지금 내 옆에 인연으로 있는 사람과 결혼해야겠다.’라는 굳은 신념 같은 것이 있었다.
11월 1일은 우리 부부의 첫 만남일이다.
그로부터 한 달 전 지인 분의 소개로 당시 유행하던 개인 미니홈피를 서로 방문해가며 가벼운 채팅 정도 하던 사이였다. 그러다가 마침 서로 시간이 맞아서 실제 대면하게 된 날이 바로 그날이었다.
그날을 기점으로 한 달 만에 상견례를 하고 3개월을 갓 넘겼을 무렵 이듬해 2월 결혼식을 올렸다. 그때는 왜 그리 빨리 결정하고 성급했던지, 그냥 때가 되어 결혼해야 하는가 보다 하고 추진했던 것 같다. 급하게 진행된 터라 시간이 매우 부족했는데, 때마침 친한 친구 동생이 웨딩 플래너였기 때문에 그 덕을 많이 봤다.
사실 결혼이란 게 ‘인륜지대사’라고 남들은 인생에서 무척 중요한 의식으로 인식하는데, 우리는 양가 허락받고 식장만 잡아놓으면, 그 사이 시간은 필요한 여러 가지를 마련하기만 된다고 쉽게 생각을 하였다. 그래서일까. 남들처럼 결혼을 준비하면서 설레는 감정이나 단계적으로 거쳐야 할 관문들을 많이 생략했던 것 같다. 심지어 여느 커플들이 모두 공을 들이는 웨딩 사진 촬영조차 귀찮아했다. 남편의 아는 형님이 운영하시는 웨딩 포토 스튜디오가 마침 폐업을 결정했다고 해서 우리가 그 스튜디오의 마지막 손님이 되어 주기로 하고, 매우 저렴한 가격으로 웨딩 촬영을 할 수 있었다. 그것 또한 그냥 통과의례로 받아들여졌고, 빨리 끝나고 안정을 찾기를 바랄 뿐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왜 그토록 재미가 없었을까? 생각이 든다.
그렇다고 다시 돌아가서 그 모든 일련의 과정을 즐기면서 다시 거치라고 해도 개인적인 성향상 그냥 귀찮고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할 것 같다. 왜냐하면 주변에서 남들의 부러움을 사며 화려하게 웨딩 의식을 치른 커플들이 모두 행복한 결혼생활을 보장받지는 못하다는 사실을 목격해 왔기 때문이다.
그 당시 나는 결혼을 마치 '해치우기 식' 인생의 통과의례쯤으로 여겼던 것 같다. 그렇다고 해서 신랑에 대한 애정이나 호감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신랑이나 나나 그동안 만나왔던 이성들과는 사뭇 다른 캐릭터였기 때문에 한 살 차이의 연상연하 커플로 서로의 호기심에서 시작하였다.
그렇게 초단기 결혼 준비를 하며, 무슨 배짱이었는지 당시 유행하던 신혼부부와 무주택자를 위한 ‘생애최초 주택담보대출’을 최대한 받아 직장 근처 소형 아파트를 구입했다. 그렇게 할 수 있었던 이유는 학창 시절부터 기숙사와 하숙집을 전전하던 내가 서울 남자를 만나 주거 안정을 꾀하고 싶었고, 마침 혼자 살던 오피스텔 전세 자금을 다른 혼수 준비를 최소화하고 신혼집 마련에 거의 쏟아부은 덕이 컸다. 물론 부족한 금액은 남편이 시아버지의 협찬을 받아 충당하였지만 말이다.
이렇게 우리 결혼은 일사천리로 모든 게 순조롭기만 한 듯 보였다.
예비 시어머니가 거금의 현금을 보내라고 전화를 걸어온 순간까지는 말이다.
어느 날 문득 전화가 걸려왔다. 시어머니였다.
“예비 며늘아기야, 내가 10년 넘게 절에 다니면서부터 알고 지낸 훌륭한 선생님이 계시는데 그분이 그렇게 훌륭하고 미래에 대한 혜안이 밝으시단다. 그 선생님이 너를 너무 좋게 잘 봤고, 너희 둘이 천생연분이라고 아주 찍으셔서... 나도 흔쾌히 결혼 승낙을 한 거거든. 그래서 너네 결혼도 이렇게 빨리 잘 진행될 수 있었던 거야.” "그래서 말인데, 이 좋은 기운을 너희 평생 쭉 이어가야 하지 않겠니? " 하시며 돈 이야기를 꺼내신 거다.
이유는 그랬다. 우리의 순탄한 결혼생활과 자식 출산을 위해 '혼인 기도'를 해야 하고 그것을 성심성의껏 해줄 도사 선생님이 그분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시어머니는 이미 2년 전에 시아버지와 황혼 이혼을 하신 상태였고, 두 분은 별거 중이셨다. 뭔가 이상하고 잘못된 것 같은 느낌은 강하게 들었지만, 지금껏 순조롭고 일사천리로 진행 중인 내 결혼에 그까짓 돈 몇 푼에 파투를 내고 싶지는 않았다. 그리고 처음 예비 시어머니가 말씀하시는데, 결코 거절하기가 힘들었다. 그래서 알겠노라고. 나답지 않게 순응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