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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연 Jul 21. 2022

1호 탄생과 이상한 산악회

결혼한 지, 6개월 만에 첫 임신을 했다.      

생전 처음 해보는 신기한 경험을 하며 나 자신을 자랑스럽게 여기던 무렵, 어느 날 시모(媤母)의 연락이 왔다. 좋은 아이 탄생을 위한 '축원 기도'를 또 올려야 한다는 것이다. 나는 바로 거절할 수 없어 생각해 본다고만 했다. 그리고 사사건건 조건을 걸고 참견하는 시모가 꽤 불편했다.  

   

그 사실을 남편에게 얘기했지만, 남편은 시모의 눈치를 보는 중이었다.

그 제안 이후로 시모는 밤낮으로 심지어 새벽까지 남편에게 문자를 보내왔다.      

'드르륵~ 드르륵~' 어느 날 문자가 도착했다는 휴대폰 진동이 울리기를 여러 번.     

임신 탓에 가뜩이나 신경이 예민해져 있던 나는 어느 새벽 시모의 문자에 남편을 깨웠다. 

     

"여보, 어떻게 좀 할 수 없어요?"     

저거 또 어머니 문자예요? 너무 하시는 거 아냐?"    

 

우리는 서로 존중을 위해 존댓말을 사용하고 있었고, 그래서 큰 부부 싸움은 없었다.  

    

남편은 "여보가 참아봐요. 내가 한번 잘 말씀드려볼게요."      


하지만 그건 그저 말뿐이었을 뿐, 결국 남편은 결혼 전 오랜 세월 자기도 모르게 사이 내내 가스 라이팅 당하던 '마마보이'였다. 사실 내가 그것을 알아차리는 데는 얼마 걸리지는 않았다.     


첫 아이 임신 이후 3개월쯤 지나던 즈음, 나는 계속되는 시모의 압박과 은근히 모른 척 피하는 남편의 태도에 못 이겨 '이번 한 번만 아이를 위해 내가 넘어간다' 생각하고 또 다시 거금을 들여 시모를 통해 태어날 아이의 축원 기도를 올렸다. 물론 기도의 집행자는 그 도사님, 의뢰자는 우리 부부, 모든 일의 가교자는 시모였다. 항상 그런 식이 었다. 지속적이고 집착 어린 시모의 강권과 반강제적인 협박, 그것을 못 이기는 마마보이 남편, 아직 처음이라 불화를 원치 않았던 나는 그런대로 만삭까지 버텼다   

  

그 해 봄, 첫 딸을 순산했다.      

자연분만을 통해 진통 4시간 만에 순산에 성공한 나는 그때 이후 아이로 인해 무척 행복했지만 몸과 마음은 더욱 피폐해져 가는 것을 느꼈다. 


학창 시절 오랜 기숙사 생활로 단체생활을 극도로 싫어하게 된 나는 산모들만 모아놓고 갓난아이와 함께 산후 케어해 준다는 고가의 '산후조리원'을 거부했다. 대신 내 집에서 산후도우미를 한 달간 불러서 조리를 했고, 이후 한 달간은 친정에서 아이와 함께 지냈다. 

     

그렇게 어느 정도 산후의 지친 몸과 마음을 추스리던 나는 다시 우리 집으로 아기와 함께 돌아왔다. 그렇게 아기의 백일이 지나고 6개월 정도 지나, 아기가 제법 목도 가누고 앉아 있을 수도 있게 되었다. 

딱 그즈음, 시모는 나에게 결혼 전 주말에 한두 번 참석한 적 있었던 '이상한 산악회'에 정식으로 초대하였다.  물론 남편은 시간 날 때마다 시모를 따라 자주 참석하곤 했던 모임이었다. 

그 산악회는 우리 결혼과 아이 축원을 위해 기도해 주었다는 그 도사님이 구심점이 되어 수십 명 멤버로 구성된 산악회였던 것이다. 


나는 그동안 임신기간과 어린 아기가 있어 참석하기 어렵다고 난색을 표명해 왔었다. 그랬더니 이번에는 남편이 오히려 자기가 아기를 업고 등산하겠노라고 나섰다. 

나만 일요일 아침 일찍 일어나서 도시락만 싸면 같이 갈 수 있다는 것이다. 

마냥 버티기도 그래서 승낙을 하고 말았는데, 말이 쉽지, 일요일 아침 새벽부터 일어나 도시락을 싸고, 등산 준비를 한다는 것은 여간 고역이 아니었다.     

게다가 나는 당시 육아휴직 없이 산후휴가만 마치고 직장에 복귀했던 때이고, 낮 시간 동안 아기는 시모가 우리 집을 출퇴근하며 돌봐주고 있던 상황이었다. 나로서는 등산 거부로 인해 혹시나 시모와 사이가 틀어질 까 신경이 쓰일 수밖에 없었다. 

      

사실 내가 세상에서 제일 싫어하는 것 중에 하나가 바로 '등산'이다.

하지만 가정의 평화를 위해 나는 결국 괴로운 몸과 마음을 이끌고 꾸역꾸역 등산에 따라나섰다. 아기는 신랑이 아기띠를 이용해 업었고, 앞으로는 등산 가방까지 메고서 말이다. 

한편으로 또 신기한 것은 집을 나설 때까지가 괴롭지, 막상 산에 올라 상쾌한 공기를 마시고, 산 정상에서 식사를 하는 것은 생각지도 못한 힐링이 되기도 하였다.   

    

그래서였을까.     


시작은 매우 힘들었지만 그 이후로 아기와 나는 남편을 따라, 아니 엄밀히 얘기하면 시모를 따라 그 이상한 산악회를 그 후로 5년이나 동행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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