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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FREESIA Dec 27. 2020

<우정의 조건>

연약하고 아름다운 것들을 들여다볼 줄 아는 영화

다른 사람의 목소리를 빌리지 말고 너의 이야기를 들려주란 말이야!
출처: 영화 <우정의 조건>

살아가다 보면 다수가 지지하는 기준, 혹은 강자가 정해놓은 기준을 따라 알게 모르게 흘러가는 경우가 있다. 지금껏 어느 누가 잘못되었다고 말한 적도 없어서 오랫동안 유지되어온 고정관념들 말이다. 이 영화 속 배경이 되는 어느 시골학교에서는 ‘럭비’가 그러하고, ‘성소수자에 대한 인식’이 그러하다. 이 학교는 럭비팀을 주력으로 밀고 대회에 출전시키기도 하는데 이 럭비에 대한 열광이 어느 정도 냐면 전교생이 럭비팀이 출전한 경기장에 가서 응원을 하고, 경기가 없을 때는 학교 수업 시간을 빼서라도 학생들에게 응원 연습을 시킨다. 이렇게 학교 전체가 럭비에 미쳐있으니 럭비에 관심을 보이지 않으면 이상한 아이가 된다. 그리고 학교에서 꼭 한 번씩 있는 잘난 무리 남자애들은 남들보다 약하거나 무리에서 소외된 아이를 게이라고 놀리면서 따돌리기 일쑤다. 영화 <우정의 조건>은 이렇게 하나의 작은 사회라고도 볼 수 있는 학교의 일상을 보여주며 이제 막 성장하며 자신에 대해 알아가는 소년들이 어떻게 세상 앞에서 서야 할지를 조언한다.


작품의 전반적인 분위기는 퀴어라는 소재를 다루고 있으면서도 다소 가볍게 느껴지는 부분이 있는 한편, 개방적이지 않은 시골 학교의 10대들이 느끼는 성소수자에 대한 시선이나 사고방식이 일면 단순할 수밖에 없지 않나 하는 점을 고려한다면 오히려 현실적인 것 같기도 하다. 그러나 영화 후반부로 나아갈수록 그렇게 가볍게 시작했던 고민들이 꿈과 우정 그리고 마음을 표현하는 서툰 방식들과 오해로 빚어지는 사건들이 함께 어우러지면서 우리에게 오랫동안 생각할 거리들을 던진다. 영화 곳곳에 등장하는 여러 곡의 올드 팝을 듣는 것 역시 즐겁다. 특히 The Trash Can Sinatras의 ‘Obscurity Knocks’와 같은 사운드트랙은 소년들의 청춘의 이미지를 대변하기에 더할 나위 없다는 생각이 든다.

출처: 영화 <우정의 조건>

영화는 네드와 코너라는 이름의 두 소년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흘러간다. 학교 아이들과 잘 어울리지 않는 네드는 따돌림을 받지만 겉으로는 신경 쓰지 않는다. 오히려 외로움이란 걸 딱히 생각해본 적이 없고, 차라리 퇴학을 당해서 학교를 벗어나 자유로워지고 싶은 게 네드의 바람이었다. 어느 날, 이 학교로 코너가 전학을 오게 되고, 네드와 룸메이트가 된다. 사실 코너는 이전 학교에서 싸움을 많이 해서 전학을 오게 된 것인데, 그래도 이 학교에서는 곧잘 적응한다. 럭비부의 에이스 선수로 활약하고 학교에서 소위 잘 나간다 하는 아이들과도 어울리게 된다. 그렇게 코너와 럭비부 친구들은 경기에서 계속 승리하며 승승장구한다. 이후 뒤풀이에서 만난 아버지가 코너에게 그제야 아들이 자랑스럽다며, 이제야 우리 아들로 돌아왔구나 하는 말을 하는데, 그 말은 코너의 맘 속의 꺼져있던 불씨를 지피고, 한편으로는 큰 상처를 남긴다. 그렇다. 코너는 문제없이 학교 생활에 적응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실은 그렇게 하려고 노력하고 있던 것이다. 친구들 무리에 어울리기 위해서 그들의 관심사와 태도를 받아들이고, 아버지의 마음에 드는 아들의 모습으로 보이기 위해 ‘진짜’ 코너의 모습은 숨기면서 말이다.


두 소년의 이야기만큼 흥미로운 건, 이들을 둘러싼 영어 교사 댄 쉐리와 럭비부 담당 교사 파스칼의 교육 방식에서의 차이점이다. 코너가 처음 럭비부로 들어와서 시범 경기를 뛰어보게 시키는데, 코너는 경기 초장부터 몸을 부딪힌 친구의 얼굴을 홧김에 피가 나고 코뼈가 부러질 정도로 때리고 만다. 그런데 놀랐던 건, 코너의 행동보다도 그 상황을 보고 미소를 띠면서 코너를 추켜 세워주며 감탄하는 파스칼의 모습이었다. 파스칼은 럭비부 수업에서도 반복해서 강조하지만 세상을 살아가려면 강한 게 중요하며, 같은 팀이어도 전쟁터에 나간 것처럼 치열하게 싸우라고 이야기한다. 반면, 댄 쉐리는 정반대의 이야기를 한다. 그는 이 학교에 새로 부임한 영어 교사인데, 학생들에게 에세이를 적어오라고 숙제를 내주며 자신들의 생각들을 스스로가 이끌어낼 수 있도록 도와주는 사람이었다. 옆 학교의 talent show에 참가하게 된 네드와 코너가 기타를 치며 노래 연습을 할 때 곡 선정에 있어서 약간의 트러블이 생기자 그는 ‘멋진 것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건 아름다운 것’이라 말해준다.


세상이 변화하듯 나 자신도 끊임없이 변화한다. 성장기의 변화일 수도 있고, 내 가족, 내 친구들, 주변 어른들이 해주는 말들과 온갖 유행하는 트렌드 사이에서 일어나는 내적인 변화일 수도 있다. 내 안에서 나 조차도 이해할 수 없는 그 변화들을 인지하고, 나에게 맞는 것들을 흡수하는 것은 막 세상을 배워가는 소년들에게 있어서 감당하기 쉬운 일은 아니다. 온전히 나의 것이 되기 이전에는 타인의 영향을 지극히 많이 받기 마련인데, 그로 인해 조금씩 변화하는 과정 속에 있는 나의 모습은 진짜 내가 아니라 할 수 있는가. 아니다. 시간이 지나면 흑역사라 기억될 만큼 서툴었던 모든 행동들, 그 당시에는 이게 인생의 전부인 것처럼 느껴졌던 나의 고집들, 촌스러운 스타일과 어울리지 않는 말투. 변화하는 시간 속에서 내가 잠시 거쳐갔던 부끄러웠던 나의 시절들의 나도 결국엔 나다. 그 시절의 내 모습이 없었다면 오늘의 나도 완성되지 않았을 것이다. 오히려 나에게 해로운 것은 타인이 나에게 어떠한 한 가지 모습이 되길 강요하거나 그리 되었음 한다며 은근한 부담을 주는 것이 아닐까. 파스칼의 말처럼 강하고 용기 있는 완벽한 모습도 좋지만 그 보다 연약한 자신을 인정할 줄 아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본다. 자신의 연약함을 인정할 줄 알아야 다양한 타인의 생각을 이해할 수 있다. 또, 그런 이해의 방식이 내 주변과 사회와 문화를 긍정적으로 변화시킬 때 조금 더 많은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하여, 이 영화의 결론이 세상의 중심이나 기준이 되는 무언가에서 반드시 벗어나야만 한하는 단편적인 조언을 던지는 것은 아니다. 자유를 위해서는 학교를 퇴학한다거나 다수의 기준이 싫으면 럭비부를 그만두어야 한다는 소리를 하는 게 아니란 말이다. 자신을 따돌린 럭비부 아이들을 싫어하는 네드이지만 ‘코너 네가 그 안에 있으면 럭비부도 나의 팀이야’라고 말할 수 있는 것처럼, 마지막에는 모두가 경기를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모두가 한 마음이 되어 다시 필드를 뛴 것처럼 어떠한 곳에 소속되든지 간에 바로 당신이 어떤 마음을 가지고 어떤 태도로 임하느냐가 중요하다고 영화는 말한다. 그것으로 충분하다.


이 작품의 전체를 통틀어서 가장 선명하게 기억에 남는 한 장면이 있다. 그리고 이 장면이 우리에게 세상을 이해하는 가장 적절한 태도를 가르쳐준다고 생각한다. 한 코드로만 서툴게 기타 연주를 하는 네드에게 댄 쉐리는 다른 코드를 하나 더 알려준다. 하나에서 고작 하나 더 배운 게 다이지만 그 코드 덕분에 이제 네드는 보다 풍부한 연주를 할 수 있게 된다. 모두가 한 가지 소리만을 낸다면 세상이 너무 단조로울 것만 같다. 높은음과 낮은음이 조화를 이룰 때 아름다운 연주가 탄생하는 것처럼 나는 이 세상의 다양한 소리를 들어보고 싶다.


평점: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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