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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편성준 Apr 26. 2024

친절하게 명령하기

보령 한 달 살기



60대 중반 정도의 낡았지만 말쑥하게 슈트를 차려입은 아저씨였다. 서울에서 보령 가는 무궁화호 내 옆좌석에 앉은 이 분은 가방을 선반에 얹고 포카리스웨트 페트병 하나를 시야에 보이는 그물포켓에 넣고 앉았다. 조용했다. 나는 민희진 기자회견에 대해 쓴 페친들의 글을 읽고 있었다. 어치피 성공한 거물 두 사람이 ‘약속대련’ 하듯이 치고받는 건데 뭘 편을 들고 걱정을 하냐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오죽하면 그랬을까‘ 공감하는 사람도 있다. 그 와중에 민희진이 욕한 부분만 편집해 밈처럼 만든 사람은 인격이 의심스러워 보였고 민희진으로 시작해 세상의 선과 악, 삶의 본질을 추적하는 철학적인 글이 등장했다. 이게 이럴 일인가 싶긴 했지만 이런 일에 무식한 편인 나는 화제가 된 이번 사건에 대한 사람들의 생각이 궁금해 몇 편을 더 찾아 읽었다.

그런데 옆에 앉은 남성분이 울리는 전화를 받더니 계속 대화를 하시는 것이었다. 처음엔 가볍게 인사를 주고받더니 지난번 만나 얘기를 하고 뭘 보내 달라기도 하며 껄껄 웃었다. 목소리가 큰 건 아닌데 그렇다고 작은 것도 아니었다. 뭔가 절묘하게 선을 탈 줄 아는 분이었다. 조금 기다리면 끊어지겠지 했는데 그렇지가 않았다. 대화는 잔잔하고도 지루하게 이어졌다. 참다못한 나는 그 남성의 허벅지를 가만히 두 번 두드리고는 웃으며 “선생님. 통화가 길어지실 것 같으면 나가서 해주시겠습니까?”라고 정중하게 물었다. 나를 쳐다보는 남성은 얼떨떨한 표정이었고 나는 계속 눈을 맞춘 채 웃고 있었다. 남성은 전화를 끊지 않고 나를 멍하니 바라보다가 갑자기 깨달은 듯 스마트폰을 뺨에 댄 채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나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성공이다. 민희진 토픽 따위는 이미 관심에서 멀어진 지 오래다. 웃으면서 명령하기라……이걸 잘 기억하고 있다가 어디 칼럼에다 한 번 써먹어야지, 하고 나는 홀아비처럼 큭큭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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