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재귀 희곡집 『공포』
연극을 많이 보고 리뷰 쓰는 걸 좋아하긴 하지만 희곡을 사서 읽는 경우는 별로 없었다. 그런데 대학로 동양서림에 가서 책을 고르다가 내가 마틴 맥도나의 『필로우맨』을 발견하고 기뻐했더니 카운터를 지키고 있던 유희경 시인이 그 책과 함께 고재귀의 희곡도 함께 읽어보라고 권하는 것이었다. 유 시인은 말했다. 다른 건 몰라도 희곡 잘 쓰는 사람을 보면 질투가 나더라고. 희곡을 전공한 시인이 부러워하는 작가의 작품은 어떤 것일까 기대를 하며 책장을 펼쳤다.
모두 세 편이 들어 있는 고재귀의 희곡집 『공포』의 표제작 「공포」는 안톤 체호프가 주인공이다. 아마 그가 쓴 단편소설 「공포」를 모티브로 했을 것이다. 실제 인물 체호프의 삶을 100년 뒤 한국의 극작가가 상상해서 쓴다는 것은 대단히 모험이고도 매혹적인 일이다. 때와 장소는 체호프가 작가 생활 절정기에 돌연 사할린으로 가서 '폐허'를 경험하고 돌아온 직후 절친인 실리와 마리 부부가 사는 러시아 페테르브르크 인근 농장이다("투르게네프가 죽은 지 10년밖에 지나자 않았습니다만"이라는 대사가 정확한 연도를 짐작하게 한다).
연극은 기존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고 교외로 내려와 농장을 꾸리는 실린과 그의 아내 마리, 그리고 그의 절친인 유명 극작가 체호프가 이끌어가는 이야기다. 실린은 사회의 도덕성과 부딪히는 자신이 급기야 존재의 의미마저 잃을까 하는 공포에 휩싸여 있으며 아내 마리는 그런 남편을 경멸한다. 그녀는 체호프를 남몰래 사랑하고 있지만 체호프는 그녀가 유부녀이기에 망설인다(이는 체호프의 단편 「공포」에서 유부남인 주제에 다른 여성을 사랑하게 된 알렉세이의 딜레마와 같은 상황이다). 여기에 로마시대 기독교 탄압으로 얼음물 속에서 얼어 죽은 '40인의 순교자' 이야기가 하인 가브릴라와 주인 실린 간의 '열 병의 포도주 내기'와 섞이며 스토리는 아주 흥미진진하게 흘러간다.
뒤에 실린 초단편 「우리들 눈동자가 하는 일」은 작은 거짓말로 촉발된 딜레마가 인간의 행동을 좌지우지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실내극이고 세 번째 작품 「어딘가에, 어떤 사람」은 애틋한 두 자매 이야기를 통해 시간의 흐름에 따른 운명의 변화가 기어이 세월호 참사와 맞닿아 슬픔을 자아낸다. 고재귀는 괴물이다. 꾸며낸 이야기지만 모두 진짜 같고 거장의 그림자 앞에서도 주눅 들지 않으면서 자신의 목소리를 낼 줄 아는 작가다. 잘 쓴 희곡을 읽는 기쁨의 시간이었다. 참고로 고재귀는 소설가 김애란의 남편이기도 하다.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 극작과 커플이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