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시차》
10.29 이태원 참사를 다룬 정혜승의 《정부가 없다》 맨 앞부분엔 저자의 개인적 경험이 등장한다. 참사가 발생했음을 알리는 뉴스 속보가 계속 뜨는데 이태원 근처에 간다던 둘째 아이에게 연락이 닿지 않았던 것이다. 저 뉴스 안에 우리 아이가 있으면 어쩌나 하는 마음으로 부부는 이것저것 따질 겨를도 없이 그저 이태원으로 달려간다. 녹사평역 부근 경찰과 구급차들을 보면서 그들의 머릿속은 이미 지옥이었다. 어떡하지? 아닐 거야. 절대 그럴 리 없어. 그때 둘째 아들에게서 전화가 왔다. 남편은 통화 버튼을 누른 뒤 왜 전화를 받지 않았냐고 버럭 소리를 질렀고 정혜승은 왈칵 눈물을 터뜨렸다.
똑같은 상황이 연극 《시차》에도 나온다. 현오와 동거를 하던 동성 애인 윤재가 집을 나간 지 한 달이 되었는데 아무 소식이 없고 TV뉴스에서는 성수대교 붕괴 참사 속보가 계속되고 있었다. 저 뉴스 안에 내 연인이 있으면 어쩌나 하는 마음으로 의사인 고모를 찾아간 현오는 윤재가 그동안 고모의 병원에 입원해 있었음을 알고 비로소 마음을 놓는다. 그런데 이렇게 무사하다고 모든 게 괜찮은 걸까. 이 연극의 희곡을 쓴 배해률 작가와 무대를 꾸민 윤혜숙 연출은 아니라고 말한다. 1994년이든 2014년, 또는 2019년, 심지어 1970년까지 시차가 있을 뿐이지 우리는 늘 사회적 참사의 가능성을 안고 살아간다는 것이다.
성수대교, 삼풍백화점, 세월호, 이태원 등 유난히 비극적인 일이 많은 나라에서 이런 연극을 쓰려니 플롯에 대한 고민이 많았을 것이다. 그런데 무려 세 시간에 달하는 연극은 사회적 참사 말고도 퀴어, 연민, 연대, 무연고자 장례 등을 다루면서도 전혀 지루하지 않게 관객을 빨아들인다. 이는 우수한 희곡과 연출의 힘이기도 하지만 출연진 전원이 일인이역을 맡아 고르게 뛰어난 연기를 보여준 배우들 덕분이다. 게이 커플 역을 맡은 이주협 배우 허지원 배우의 연기는 너무 자연스러워 저절로 그 캐릭터들을 응원하는 마음이 생겼고 윤재가 일하는 게이빠 '사장형' 역의 정대진 배우는 '크리스마스 립싱크 댄스' 하나만으로도 관객을 들었다 놨다 하는 괴력을 발휘했다. 극을 이끌어가는 또 다른 주역 신지원 배우와 우미화 배우 역시 흠잡을 데가 없었다. 특히 우미화 배우는 성북동 주민들이 다니는 허름한 술집 덴뿌라에서 만났을 때는 평범한 동네 사람이었는데 《금성연인숙》 《20세기 블루스》 같은 연극에서는 볼 때마다 카리스마가 작렬한다.
공연이 모두 끝나고 커튼콜까지 했는데도 아내는 우느라 한동안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했다. 나도 울었고 객석에도 손수건과 티슈로 눈물을 수습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극장을 나서면서 이런 연극을 만들어 주는 사람들이 있어서 참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참사를 다루고 있지만 그래도 절망적이진 않은 게, 극 중에서 소수자 경멸로 온몸을 맞아 피떡이 되어 쓰러진 윤재를 둘러업고 병원까지 데려다주고 사라진 사람처럼 따뜻한 마음이 아직 우리 곁에 남아 있기 때문이다. 여러 의미로 뛰어난 작품인데 연극적 재미로만 따져도 절대 빠지지 않으니 꼭 보시기 바란다. 2024년 11월 16일까지 두산아트센터 Space111에서 공연한다.
● 작:배해률
● 연출:윤혜숙
● 드라마터그:김지혜
● 무대디자인:김혜림
● 조명디자인:성미림
● 음악감독:박소연
● 출연:우미화, 정대진, 허지원, 이주협, 신지원
● 기획,제작:두산아트센터
● 극장:두산아트센터 Space1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