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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편성준 Nov 23. 2024

지독하게 슬픈데 뒷맛은 개운한 비극

윤성원 일인극 《붉은 웃음》

 

사는 건 기본적으로 비극의 퍼레이드다. '인생은 고통의 바다'라고 하신 부처님 말씀은 2,500년 전에도 인간들이 불행과 슬픔을 옆구리에 끼고 살았음을 웅변한다. 우리는 왜 불행한가. 인간은 서로를 사랑하고 돕지만 때로는 서로를 죽일 정도로 미워할 수도 있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전쟁에서 이기더라도 기뻐하는 사람은 소수에 불과하고 대부분의 인민들은 피눈물을 뿌려야 한다. 그런데 우리는 왜 지금도 전쟁을 멈추지 못하나.


1904년 러시아에서 발간된 레오니트 니콜라예비치 안드레예프의 『붉은 웃음』(Красный смех)을 원작으로 한 김정 연출의 연극 《붉은 웃음》은 러일전쟁에서 두 다리를 잃고 돌아온 형과 아우의 이야기다. 형은 전장에서 돌아온 뒤 가족과 대화도 단절할 채 미친 듯이 글을 쓰다가 두 달 만에 죽는다. 동생이 달려가 보니 종이 위엔 아무것도 쓰여 있지 않았다. 이 스토리 위에 2024년 서울에 사는 청년의 고독사 사연이 붙는다. 김정 연출은 1904년 러시아의 비극과 2024년 서울의 비극이 본질적으로 같다는 걸 직감했고 각본을 맡은 하수민 작가 겸 연출은 그 의도를 정확히 꿰뚫어 고전과 현대가 완벽하게 어우러지는 부조리극을 완성했다. 왜 부조리냐 하면 이건 신의 영역을 떠난 인간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연극을 보는 내내 하이데거와 사르트르 생각이 났다. 실존주의자들은 인간을 '아무런 이유나 사명 없이 이 세상에 던져진 우연한 존재'로 보지 않던가. 쓰레기가 가득한 방에서 죽어가는 청년은 그 비극적 실존의 끝을 보여준다.  


연극이 시작되면 하얀 방제복을 입고 묵묵히 검은 쓰레기봉투를 나르는 남자가 등장한다. 유품관리사부터 러시아의 형, 아우, 그리고 고독사 청년까지 도맡아 모노드라마를 펼치는 윤성원 배우다. 그는 독거인의 방으로 들어가 그가 죽음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을 유추한다. 음식이 떨어지고 전기와 수도가 끊기는 동안 남자는 두려움 속에서 고지서 위에 유서 같은 낙서를 남긴다(김완 작가의 책 『죽은 자의 집 청소』를 보면 도시에서 죽음을 상징하는 확실한 징조로 전기공급이 끊기는 걸 꼽는 대목이 인상 깊었는데 여기서도 마찬가지다). 이미 의식을 잃었을 텐데도 유서는 계속된다. 숨이 멎고 하체가 썩기 시작하고 벌레들이 생겨난다. 묘사만으로도 괴로운 이 장면들을  윤성원 배우는 처음부터 끝까지 혼자 연기한다. 엄청난 모험이다. 프로젝트에 들어가기 전 김정 연출은 윤성원 배우에게 몸을 만들 것을 요청했다고 한다. 비극적인 상황에 맞는 깡마른 몸매를 만들어야 한다는 게 그 이유였고 그 말을 들은 윤성원은 실제로 그렇게 실천했다.


무대 위에 선 기름기 하나 없는 윤성원의 몸은 배우의 피지컬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다시 하 번 알려준다. 며칠을 굶은 채 외투만 걸치고 책상에 앉아 글을 쓰거나 검은 비닐봉지 사이에 누워 몸부림치며 서서히 죽어가는 남자인데 살이 늘어지거나 기름기가 돌아서야 되겠는가. 바닥의 흙과 모래를 손으로 파서 묻혀 있던 옷과 신발을 찾아내고 검은 쓰레기봉지 사이에서 괴로워하는 윤성원의 열연을 보고 있노라면 연출이 참 잔인하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이렇게 슬프고 비참한 이야기를 타협 없이 밀어붙이는 게 진정한 용기라는 생각도 들었다. 김정이나 사이먼 스톤 같은 사람들은 고전을 가지고 놀 줄 아는 사람들이다. 누구나 아는 오래된 이야기를 어떻게 선택하고 재창조하느냐에 따라 진부함이 남기도하고 천재성으로 빛나기도 한다. 물론 이들은 후자다.


비극의 클라이맥스를 지나 다행히 윤성원은 이렇게 외친다. "인간은 생각보다 강해. 그러니 뛰어내리지 마. 죽지 마." 다행이었다. 끝까지 참고 연극을 본 보람과 안도감이 몰려왔다. 나는 신철규 시인이 시집 『지구만큼 슬펐다고 한다』의 맨 앞에 썼던  '절벽 끝에 서 있는 사람을 잠깐 뒤돌아보게 하는 것, 다만 반걸음이라도 뒤로 물러서게 하는 것, 그것이 시일 것이라고 오래 생각했다'라는 대목이 떠올랐다. 그의 감동스러운 문장을 이번엔 연극에서 만났다. 연극이 끝난 뒤 샤워를 마치고 로비에 나타난 윤성원 배우의 깔끔한 모습에 가슴을 쓸어내렸다. 어리석다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연극을 보는 묘미는 이런 것이다. 객석에 앉아 배우와 연출가, 스태프들이 펼쳐 놓은 이야기 속으로 한껏 빠져 들었다가 막이 내리고 불이 켜지면 다시 현실로 돌아와 툭툭 털고 집으로 돌아가는 것. 김정과 윤성원이 작심하고 만든 연극 《붉은 웃음》을 강추한다. 2024년 12월 1일까지 한남동 더줌아트센터에서 상연한다.


● 원작 : 레오니트 안드레예프

● 번역 : 이수경

● 원작/재창작 : 하수민

● 구성 : 김정 윤성원 이동인

● 연출 : 김정

● 출연 : 윤성원

● 주관 : 프로젝트내친김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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