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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물을 실어 나르는 유머의 향연

<기획회의>에 쓴 김홍의 『말뚝들』리뷰

by 편성준

매달 《기획회의》에 문학 리뷰를 하고 있는데

지난 달엔 화제의 소설인 김홍의 『말뚝들』

리뷰를 썼습니다. 제가 좀 흥분해서 글을 썼는데,

그만큼 소설이 재밌다는 반증이라 생각합니다.

일독을 권합니다.


<눈물을 실어 나르는 유머의 향연>


문학상 심사하는 장면을 상상해 본다. 여러 작가와 평론가들이 한자리에 모여 심각한 표정으로 작가 이름이 가려진 원고를 읽고 투표를 한다. 심사위원들은 서로 말은 안 해도 어떤 작품이 좋은지 서로의 눈빛에서 읽어내고는 안도한다. 나도 광고회사 다닐 때 공익광고 심사위원을 몇 번 해봐서 안다. 제30회 한겨레문학상 수상작으로 김홍의 『말뚝들』을 뽑을 때도 그랬다. 심지어 어떤 심사위원은 “이거 김홍이 쓴 거 같은데?” 하다가 수상자를 확인한 뒤 “김홍이네!” 같은 반응을 보였다고 한다. 좋은 작품을 알아본다는 것과 누구의 작품인지 알아맞힌다는 것은 조금 다른 문제라고 생각한다. 아마 김홍이라는 작가가 그동안 쌓아 올린 문학성과 스토리텔링 능력이 객관적으로 인정을 받아 온 결과일 것이다.


은행에서 대출 심사를 맡아 진행하는 직원 장은 어느 날 출근길에 자신의 차 앞유리 와이퍼에 꽂혀있던 ‘트렁크에 넣어 두었습니다’라는 쪽지를 발견한 직후 그 차 트렁크 안에 갇히는 변을 당한다. 순식간에 손발이 묶이고 복면까지 씌워졌으니 꼼짝없이 죽었구나 싶었는데 다행히 더 이상의 폭력은 없었다. 꼼짝도 못 하는 상태에서 달리는 자동차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배철수의 음악캠프’ 타이틀곡과 배철수의 오프닝 멘트를 수동적으로 듣는 장면은 기이하면서도 헛웃음이 나온다. 김홍 작가는 이 장면을 쓰기 위해 실제로 트렁크 안에 들어가 누운 채 아내이자 소설가인 이유리 작가에게 운전을 부탁했다고 한다. 사람 살리라고 외치는 남편의 비명에 놀란 이 작가가 액셀을 밟아 차가 더 빨리 달리는 바람에 괴로웠다는 김홍의 웃기는 후일담이 있다(이 얘기는 소설 관련 동영상에서 보고 알았다).


싱겁게도 장은 해코지는 전혀 당하지는 않은 채 그냥 차에 실린 채 끌려다니다가 범인들 얼굴은 보지도 못하고 집으로 돌아온다. 그리고 그 사건 앞뒤로 밀랍처럼 생긴 문제의 ‘말뚝들’이 나타난다. 서해안에 나타났던 말뚝들은 광화문 세종대왕 동상을 둘러싸기도 하다가 결국 장의 아파트 거실에도 나타난다. 문제는 처음 등장한 1호 말뚝의 입안에서 장의 명함이 나왔다는 것이다. 말뚝들과 마주친 사람들은 까닭 없이 눈물을 흘린다. 왜 우는지는 모른다. 그냥 눈물이 나는 것이다. 말뚝들은 무슨 한(恨)을 가지고 있는 게 아닐까. 한밤중에 신임 사또들을 찾아가 놀라게 하던 장화·홍련도 결국 한을 풀어달라는 부탁을 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던가.


납치를 당한 게 자기 잘못도 아닌데 경찰서에서 신고하는 과정에 은근히 반말 섞은 반존대 말투를 쓰는 형사에게 시달려야 했고 늦기 전에 병원에 가서 진단서도 떼어야 하는데 마침 그날에 금요일이라 서두를 수밖에 없는 처지를 두고 장은 ‘금요일은 납치에서 풀려나기에 좋은 요일이 아닌 듯했다’라고 투덜댄다. 나는 김홍의 이 유머 감각이 놀라웠다. 대민그룹 둘째 아들로 대변되는 대기업의 비양심적 처사와 경제 범죄, 카지노, 외국인 노동자 문제, 그리고 산업 재해, 계엄령까지 읽다 보면 굉장히 심각한 소재들인데도 부지런히 책장을 넘길 수 있는 건 사건 사이사이마다 김홍이 끼워 넣은 시니컬한 유머와 삶을 관통하는 페이소스 덕분이다. 십 년을 만난 여자친구 해주와 헤어지고 엘리베이터도 고장 나서 매일 아파트 15층까지 혼자 걸어서 오르내려야 하는 주인공 장은 안 그래도 억울한 일이 많은데 그 와중에 친하게 지내던 여성 직장 동료에게 "바람피운 걸 남편에게 들켰는데, 바람 상대를 남편이 알면 진짜 큰일 나니까 네가 가짜 상대역을 좀 맡아 달라"라는 말도 안 되는 부탁까지 받는다.


김홍은 괴물이다. 글을 정말 잘 쓰고 이야기를 전개하는 데도 머뭇거림이 없다. 정말 재밌게 단숨에 읽었다는 정지아 작가의 심사평은 거짓말이 아니었다(나는 요즘 바빠서 단숨에 읽진 못하고 두세 번에 걸쳐 읽었다). 이기호 소설가는 '김홍을 어찌하면 좋단 말인가'라고 심사평에 썼다. 카메오로 백종원도 나오고 배철수도 잠깐 나오는데 그런 게 전혀 유치하게 느껴지지 않는 게 이 소설의 장점이다. 재미와 문학성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은 소설가라는 믿음은 문지혁 작가의 ‘곧 우리나라의 모든 문학상을 받을 것만 같은 김홍 작가’라는 감탄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김홍은 쓰면서 스스로 재미있어야 잘 써지고 흥이 난다고 한다. 그는 ‘뉴스를 보면 정말 엉뚱한 일이 갑자기 생겨나지 않나?"라고 하면서 아무래도 이 세상에 어떤 위원회라는 존재가 뒤에서 그런 엉뚱함을 조정하지 않나 싶었다고 했다. 이 세상 알 수 없는 원리에 대한 궁금증에서 출발한 작품이 『엉엉』 『프라이스 킹!!』 『말뚝들』 등 '위원회 3부작'이다.


‘브라운 신부’ 시리즈로 유명한 영국의 작가 G. K. 체스터턴은 “진지함이 아직 문고리를 더듬을 때, 유머는 문 밑으로 먼저 스며든다.”라고 했다. 코믹 판타지의 대가 테리 프래쳇은 또 어떤까. 우스꽝스러운 설정과 촘촘한 말장난으로 독자들이 웃다가 쓰러지게 만든 그는 정작 죽음과 기억, 존엄 같은 가장 무거운 주제를 다룰 때 더 사랑받았다. 그의 팬들이 작가 사후에도 “당신의 이야기가 우리를 살게 했다”라고 고백하듯 프래쳇의 유머는 현실의 불합리 앞에서 사람이 무너지지 않게 붙드는 장치였다. 김홍의 『말뚝들』도 이 계열이다. 계엄과 산업재해, 대기업의 폭력 같은 것들이 소설 속에서 농담을 통과할 때, 그것들은 가벼워지는 대신 정확해진다. 독자는 웃다가 웃음이 안내한 자리에서 비로소 운다. 그리고 책을 덮으며 깨닫는다. 유머는 슬픔의 반대말이 아니라, 슬픔을 안전하게 데려오는 가장 빠른 구급차라는 것을. 김홍의 차는 사이렌 대신 재치를 울리고, 우리 모두를 목적지까지 실어 나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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