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 토마스 앤더슨 감독의 수상 소감문을 듣고 한 생각들
폴 토마스 앤더슨 감독이 드디어 아카데미상을 받았습니다.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로 최고의 영예인 작품상은 물론 감독상·남우조연상·각색상·편집상·캐스팅상 등 6관왕을 차지한 거죠. 지금은 내용도 잘 기억나지 않는, 기네스 펠트로가 나왔던 데뷔작 《리노의 도박사(Hard Eight)》 때부터 그는 남달랐습니다. 포르노 배우와 감독 이야기로 마틴 스콜세지를 오마주했던 《부기 나이트》 역시 끝내줬고요. 그 이후에 만든 작품들은 뭐 말할 것도 없는 명작들인데 유독 아카데미와는 인연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영화와는 별개로 그의 오늘 수상 소감은 그것 자체로 명문이요 감동이더군요. 그는 감사의 말을 전하며 1975년 작품상 후보작들을 끌어옵니다.
“1975년 아카데미 작품상 후보작들을 생각해 보세요. 《개 같은 날의 오후》,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 《죠스》, 《내쉬빌》, 그리고 《배리 린든》…… 그 영화들 사이에는 ‘최고’라는 것이 없습니다. 그날그날의 분위기가 있을 뿐이죠. 어떤 날에는 어떤 영화가 선택될 뿐입니다. 그래서 오늘 밤 후보에 오른 모든 영화들과 함께 이 여정의 일부가 된 것이 정말 기쁩니다. 아카데미에 의해 인정받지 못했지만 올해 만들어진 수많은 영화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정말 훌륭한 영화들이 아주 많았습니다.”
그는 자신의 ‘원 배틀…’ 말고도 후보에 오른 영화들이 모두 빼어난 작품이었음을 강조하기 위해 밀로스 포먼, 스티븐 스필버그, 로버트 알트먼, 스탠리 큐브릭 등이 ‘별들의 전쟁’을 벌였던 1975년 아카데미 시상식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이 에피소드가 갑자기 생각난 걸까요? 절대 아닙니다. 시상식 며칠 전부터 고심하며 아이디어를 내고 초안을 쓰고 연습했을 겁니다. 천재들의 공통점은 머리가 좋은데도 불구하고 열심히 한다는 데 있으니까요.
수상 소감 하면 떠오르는 건 황정민의 ‘밥상 소감문’입니다. 청룡영화상 시상식에서 《너는 내 운명》으로 남우주연상을 받은 황정민은 “사람들에게 일개 배우 나부랭이라고 나를 소개합니다. 60여 명의 스태프들이 차려놓은 밥상에서 나는 그저 맛있게 먹기만 하면 되기 때문입니다.”라며 자신을 낮춰 말하죠. 이 수상 소감 역시 황정민이라는 이름이 불려지는 순간 ‘밥상을 얘기해야겠다’라고 아이디어를 떠올린 게 아닐 겁니다. 무척 고심해서 수상 소감문을 쓰고 정성껏 외웠겠죠.
그동안 연기파라고 생각한 적이 한 번도 없던 조여정이 《기생충》으로 여우주연상을 받고 했던 수상 소감도 기억납니다. 그는 연기야말로 자신이 짝사랑하는 존재였음을 고백합니다. 그리고 클로징 멘트였던 “묵묵히 걸어가 보겠습니다. 지금처럼 씩씩하게 잘 열심히 짝사랑을 해보겠습니다. I'm deadly serious.”라는 말을 합니다. 평범하던 멘트에 더해진 마지막 영어 한 마디에 사람들은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진심의 박수를 보냅니다. 《기생충》에서 허영심이 많아 중간중간 영어를 섞어 쓰던 부잣집 사모님 영교의 캐릭터를 수상 소감에서 멋지게 재탕했기 때문이죠. 이렇듯 수상 소감은 상을 받은 사람을 다시 한 번 빛나게 해주는 중요한 텍스트가 됩니다.
또 하나 떠오르는 수상 소감이 있습니다. 1997년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굿 윌 헌팅》으로 각본상을 받은 맷 데이먼과 벤 애플렉의 수상 소감입니다. 두 사람은 어린 시절부터 함께 영화를 꿈꾸던 친구였죠. 맷 데이먼은 떨리는 목소리로 이렇게 말합니다. “이건 말도 안 되는 일입니다. 우리는 보스턴에서 영화를 좋아하던 두 친구였을 뿐인데요.” 그리고 벤 애플렉은 덧붙입니다. “우리는 평생 이런 일이 우리에게 일어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젊은 두 친구가 꿈의 자리에서 서로를 바라보며 웃던 장면은 그 자체로 한 편의 영화 같은 순간이었습니다.
역대 수상 소감 중 제가 제일 좋아하는 건 폴 사이먼(Paul Simon)이 1976년에 솔로 앨범을 내고 ‘Album Of The Year’를 받았을 때 한 농담입니다. 그는 그래미 시상식에 나가 자신이 상을 받을 수 있도록 도와준 많은 사람들에게 고마움을 전하고 마지막으로 이런 말을 남깁니다. “무엇보다도 올해는 한 장의 앨범도 내지 않아 주신 스티비 원더 님께 감사하고 싶습니다.” (And most of all, I'd like to thank Stevie Wonder, who didn't make an album this year). 음악 천재 겸 그래미 단골 수상자인 스티비 원더가 앨범을 냈으면 당연히 그가 탔을 텐데 마침 올해에만 안 내는 바람에 자신이 상을 타게 되었다는, 겸손과 재치가 넘치는 멘트가 아닐 수 없습니다.
수상 소감문도 문학이 될 수 있을까요? 물론입니다. 문학이란 결국 한 사람이 자기 경험과 감정을 가장 적절한 언어로 압축해 전달하는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짧은 말속에 이야기와 맥락, 인물과 감정이 함께 살아 있다면 그것은 이미 작은 서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수상 소감은 길지 않아도 하나의 완결된 텍스트, 다시 읽히는 문장이 될 수 있습니다.
수상 소감뿐 아니라 중요한 자리에서 자신의 생각과 느낌을 전달할 수 있는 글은 모두 문학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미국이나 유럽의 정치인들이 선거철이면 방송국에서 일하는 유머 작가들을 몇 명씩 고용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오늘 폴 토마스 앤더슨의 수상 소감이 그 대답이 될 것 같습니다. 잘 짜여진 한 마디의 말은 인상을 바꾸고, 때로는 인생까지 바꿉니다.
(*올해도 시상식 중계를 해주신 이동진 평론가와 김태훈 팝칼럼니스트, 그리고 안현모 통역사에게 감사드립니다. 당신들이 있어서 저는 ‘1인치의 장벽’을 뛰어넘어 마음껏 웃고 즐길 수 있었습니다. 내년에도 잘 부탁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