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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밀도 Oct 27. 2024

0. 프롤로그

사람들의 발걸음 소리, 작은 휴대전화를 귀에 대고 지껄이는 소리, 성미 급한 운전자들의 경적. 군중들 속에서 누군가 튀어나와 나의 복부를 가격할 것 같은 두려움이 세포 속에서 꿈틀거린다. 나는 아직도 과거에서 벗어나지 못했음이 분명하다. 2년의 기억을 통째로 상실해 버렸지만, 내 몸은 폭력의 두려움을 기억하고 있다. 두려움이 아직도 내 몸 어딘가에 도사리고 있다. 반사적으로 반응하는 내 몸이 그 증거다. 인간의 몸에서 기억의 중추는 감각세포가 분명하다. 어쩌면 스스로 끔찍한 고통의 기억을 삭제했을지 모르지만, 감각의 기억까지는 삭제하지 못한 것이다. 숨이 가빠진다. 응축되었던 뜨거운 혈액이 밖으로 나오려고 요동친다. 거리의 사람들이 모두 나를 향해 다가오는 것만 같다. 피하지 못했다고 눈을 흘기고, 저리 꺼지라고 어깨를 부딪치고 욕을 해대는 소리가 귓가에 맴돈다.


더는 걷지 못하고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하지만 지체할 시간이 없다. 빨리 이곳을 벗어나야 한다. 사람들이 제각각 움직이는 이 거리를 보면 정교하게 설계된 코드를 보는 것 같다. 많은 사람이 일사불란하게 자신의 규칙을 안다는 듯 움직인다. 혼란스럽지만 혼란스럽지 않다. 혼란스러운 것은 오직 나뿐이다. 이 거리 어딘가에는 이 복잡한 도로의 설계자가 나를 지켜보는지도 모른다. 설계자의 계획에 없던 나는 견고한 세계에 침투한 바이러스처럼 사람들의 발걸음을 방해하고 있다. 사람들은 나를 노려보고 지나쳐갈 뿐 누구 하나 도움의 손길을 건네지 않는다. 나는 장애물처럼 홀로 주저앉아있다.


호흡을 가다듬고 일어나 빠른 걸음으로 건물과 건물 사이의 작은 골목으로 몸을 피한다. 골목에서 먼저 담배를 피우고 있던 젊은 남녀가 나를 힐끔 본다. 아니 그들은 나를 노려본다. 그들이 먼저 선점한 공간에 내가 방해를 놓았다. 금방이라도 나의 등에 칼을 꽂을 것만 같다. 다른 길로 피해 갈까 싶어 움직이려는데 다리에 힘이 풀려 몸이 휘청거린다. 차가운 건물 벽에 겨우 등을 대어 넘어지는 불상사는 피한다. 숨을 쉬어보려고 고개를 들어 기도를 확장한다. 검게 선팅이 되어 있는 유리 건물 위로 조각보 같은 작은 하늘이 보인다. 원래 하늘의 자리인지, 건물의 자리인지 헷갈릴 정도로 이 도로에는 건물들의 존재감이 크다. 신선한 공기가 폐로 들어오는가 싶었는데, 바람결에 날아온 담배 냄새가 폐에 꽂힌다. 반사적으로 폐가 반응을 한다. 갑자기 터진 기침 덕분에 정신이 번뜩 든다. 이 좁은 골목길에서 내가 기침을 하면 담배를 피우는 남녀는 정말로 나를 가격할지 모른다. 나는 살기 위해 기침을 참아낸다. 온몸을 부들부들 떨며 기침을 삼키자 식은땀이 난다. 몇 번 기침을 삼키자 호흡이 정상으로 돌아왔다. 기침하는 것조차 주눅이 들어서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한다. 이런 피해 의식은 나에게는 익숙하다. 떨리는 손으로 등에 메고 있던 배낭에서 박하사탕을 하나 꺼내어 문다.


박하의 향이 입안에 퍼진다. 심장의 박동이 조금씩 제자리를 찾아가고 있다. 시원한 박하 향과 함께 숨을 깊이 들이마신다. 목구멍까지 싸한 맛이 전해진다. 한결 편안해진 호흡으로 여전히 바쁘게 걷고 있는 사람들로 시선을 옮긴다. 조금 전 홀로 주저앉았던 지점에서 누군가가 나를 쳐다보고 있다. 깡마른 몸에 핏기 없는 노란 얼굴, 하늘거리는 흰색의 시폰 원피스. 엄마다. 엄마? 엄마가 왜 거기 있어?


아빠는 엄마가 분명 죽었다고 했다. 내가 용인 납골당에 가서 엄마한테 분명히 인사를 했잖아. 근데 왜 엄마가 거기 서 있는 거야? 꿈인지 현실인지 판단은 보류하기로 한다. 눈앞에 있는 엄마를 놓칠까 봐 조급한 마음으로 엄마를 부른다. 


"엄마! 거기 있어. 내가 갈게.”


엄마는 내 목소리를 들었는지 나에게 시선을 돌린다. 그리고 웃는다. 내가 아플 때 나보다 더 아파해주는 유일한 존재. 엄마다. 나는 엄마에게 달려간다. 엄마 대체 어디 있었던 거야.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지만 있는 힘을 다해 한 걸음씩 발을 내디딘다. 엄마에게 겨우 손이 닿으려 하는데, 엄마의 몸이 잡음이 생긴 홀로그램처럼 점점 흐려진다. 흰 원피스를 입고 있던 엄마의 몸이 순식간에 해석할 수 없는 코드들로 채워진다. 손을 뻗어 잡아보려고 하자 숫자와 알파벳들이 내 손가락을 맞고 튕겨 나간다.


현실이 아니었나? 내가 서 있던 곳이 내 악몽의 메타버스였던 건가? 어디까지가 나의 기억이고 어디까지가 변수 개체인가? 분명 현실에서 나는 학원으로 향하고 있었는데 어디에서부터 길을 잃은 것일까?


손목을 내려다본다. EXIT 밴드가 보인다. 나는 접속 중이었다. 너무 생생해서 현실이라고 착각을 한 모양이다. 밴드 속의 시계가 EXIT 할 시간을 알리고 있다.


29분 58초. 59초, 30분. 진동이 울린다.


와장창. 사람들이 넘치던 거리와 빌딩 숲의 하늘이 산산조각이 난다. 내 몸이 끝이 보이지 않는 어둠으로 떨어진다. 젠장 또 버그다. 일주일째 악몽의 메타버스 안에서 뜬금없이 엄마가 등장하고, 나는 항상 현실과 가상을 구분하지 못하고 엄마에게 달려간다. 그럼 엄마는 즉시 코드로 변해버린다. 오늘도 당했다. 나는 기운이 빠져 밴드의 EXIT 버튼을 누른다.


헉헉. 악몽의 메타버스를 빠져나오자마자 숨이 토해져 나온다. 심장이 튀어나올 지경으로 요동친다. 어두운 창고 안에서 몸을 일으켜 노란 알약을 목구멍으로 삼킨다. 마법처럼 심장이 잠잠해진다. 땀이 흥건하게 젖은 VR기기를 벗어 내 앞에 놓는다. 버그를 해결해야 한다. 여기서 멈출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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