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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끼 May 11. 2024

브런치책 출간 후 더 이상 글을 쓸 수 없었다.

하루키처럼 글과 세상을 달리고 싶다는 의지는 온데간데

https://brunch.co.kr/@foucault/98

작년에 어쩌다 보니 두 권의 책을 출간했다. ‘브런치’라는 통로 덕분에 탄생한 책 한 권과 공동연구를 하며 완성된 또 다른 책 한 권.

취미로 사주를 봐주는 친구가 그 해에는 어떤 성과가 나올 거 같다고 하더니 진짜로 책들이 나왔다. 책을 낳는 일은 마치 산고와 같다고 했던가. 책을 낳은 후유증이 생각보다 커서인지 회복하기에 급급했다. (제대로 회복했는지 알 수 없다.) 출간 이후 피상적이고 가벼운 생각들과, 무거운 현실 속에 치여 한동안 글자를 읽지도, 쓰지도 못했다. 책들이 나온 지 한참이 됐는데도 소식이 업데이트되지 않자 슬슬 주변에서 물었다.


‘요즘은 글 안 써?’ 안팎으로 들려오는 목소리에 '응, 나 이제 글 못 써.'라는 시답잖은 하소연을 했다. 풀기 귀찮아 화장대 한 곳에 처박아둔 금목걸이처럼 글을 읽고 쓰는 것이 얼마나 값진 일인지 알면서도 외면해 왔다. 잘 풀어헤치면 허전한 목덜미에서 반짝 거리지만 현재로서는 배배 꼬인 채 존재하면서 안 하는 존재. 그러다 갑자기 브런치에 낯선 유입들이 있다는 알람을 받고 다시 컴퓨터 앞에 앉아 곰곰이 왜 목걸이를 풀기를 미뤘는가 생각하다가 풀어보았다.

처음 글을 쓰기 시작했을 땐 굉장히 가벼운 마음이었다. 글에 지대한 의미를 두지 않고, 그저 오늘 하루를 내 방식대로 잡아두고 싶은 마음에서. 이 글을 세상의 대중에게 전개하고 인정받겠다는 생각보다도 우연히(아니 필연히) 네 발 달린 식구들과의 하루하루를 더 내밀하게 잡아채고 홈비디오처럼 남겨두고 싶은 마음에서 출발되었다. 하지만 막상 이것을 대중에게 전달해야 한다고 하니 단어 하나를 선택할 때도 명료한지, 부적절한지 고심고심하는 과정을 거쳐야 했다. (명확함과 친절함은 모든 창작물의 기본이라고 생각한다.)


두세 권의 책을 위한 글을 쓰면서 세공하는 시간과 원하는 기준치가 상향되었다.  이전 같았으면 바로 ‘발행’ 버튼이 눌렸을 글들이 건네지지 못한 채 ‘임시저장’에 한가득 쌓였다. 정답이 익숙하던 세상에 젖어있다가 정답이 존재하지 않는 ‘창작’의 세계에 들어가니 탈고 지점을 도저히 찾을 수가 없었다. 음독할 때마다 수정하고 싶은 부분이 생긴다.  그리고 멈출 생각을 하지 않는다. 답답한 나머지 글을 종이에 출력하여 산속 공원에 앉아 쭉 읽었다. 사실 틀린 표현이라기보다 더 나은 문장과 흐름이 자꾸 보여서 도대체 언제 이 산을 떠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에 눈물이 났다. (너무나도 답답하여 은유 작가님께 여쭤보기까지 했다.)

에라 모르겠다. 누워서 유투브나 봐야지

그리고. 이런 표현이 적절할지 모르겠지만 뇌가 숏폼에 ‘절여졌다.’ 절여져서 흐물텅거리고 축 늘어졌다는 표현만큼 정확한 게 없어 보인다. 그 때문인가 글을 읽고 표현을 생각해 내는 속도가 현저히 떨어졌다. 처음 숏폼이 등장했을 때가 기억난다. ‘도대체 30초짜리 영상을 봐서 뭐 해.’라던 나는 이제 30분짜리 영상도 빨리 넘기기를 하며 보고 있다. 가뜩이나 생각의 호흡이 짧은 편인데 이제는 조금만 달려도 숨이 턱끝까지 차오른다. 그 어떤 정서적 감응 없이 그저 말초적인 시각적 감각만이 비대하게 발달되었다. (오펜하이머나 듄 같은 영화는 꼭 영화관에서 보는데, 애석하게도 집중할 수 있도록 강제시킨다는 점도 꽤 큰 이유이다.)


독자분들은 아시겠지만 글을 쓰는 동안 일을 줄였였다. 현실 지형에서 잠시 벗어나 책과 영화, 동물과 식물 속에 거의 파묻혀있을 때 글이 쓰여졌다. 머리의 숨구멍(풍혈- 제주도에서 건진 반짝이는 표현.)에 바람이 부니 조금은 입체적으로 상황들을 바라볼 수 있었다. 그러나 다시 현업으로 복귀하면서 퇴근 후에는 배민으로 나를 위로하며 잠에 드는 게 전부였다. 그리고 친구에게 건넸다. ‘주 5일 일하면서 책 읽는 사람은 제정신이 아닌 듯.’ 주 5일 근무하시면서 주말마다 카페에서 글을 써 책을 냈다던 갤러리 관장님의 말씀을 되새기자고 마음먹은 게 두 달이 채 되지 못했다. 일에 허우적대보니 바람 드나들던 구멍이 모두 꽉 막혀 머릿속이 안개로 가득하다.


 번호까지 매겨보며 내세운 구차한 자기합리화는 여기까지다. 때론 창작과 현실이 어깨를 짓누를 때도 있었지만 한편으로는 유영하는 것처럼 가벼운 날들도 있었다. 책으로 파생되는 감사한 일들이 가득했다. 낯선 이들을 글로 만나고, 얼굴을 마주해해 시간을 나누기도 했다. 책을 통해 나와 우리 식구들을 아껴주시는 마음을 한껏 받을 수 있었다. 게다가 글을 쉬는 동안 나의 개가 이제 치료를 끝마쳤다. 시각이 제거된 삶에 익숙해진 개와 다른 양상의 이야기도 한가득 이어졌다. 올해는 기존의 일을 다시 조금 줄이고, 집안 어른 일을 도와드리고 있어 색다른 바람이 들어차지 않을까 하는 기대도 조심스레 가져본다.

완치 판정 받은날! 병원 고양이는 향년 18세에 고양이별로 떠났다

 얼마 전 진짜 광기는 다자이 오사무가 아니라, 매일 달리기를 하고 글을 쓰던 하루키가 진짜 광기라던 밈을 봤다. 그 밈 덕(?)에 하루키가 되보고자 정교하고 밀도 있진 않지만 날것의 글감들을 우선 저장고 안에 하나둘 담아놓았다. 시간이 지나면 아무리 좋은 재료들도 퇴색된다. 그나마 다행인 건 달걀이나 양파보다는 유통기한이 길다는 점. 이제 다시 이야기들을 어떻게 품어낼지 고민되는 시점이다.

쌓아두기만 하였던


여차저차 구차한 핑계는 여기까지로 두고 다시 써보겠습니다. 기다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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