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홀로 파주 여행기
어젯밤 열어놓은 창문에서 아이들의 웃음소리와 새소리가 들려왔다. 투명한 시폰 창문이 바람에 살랑이며 흔들리고 있었다. 밝지만 부드러운 햇빛이 방 안을 비추고 있었다. 우드톤의 가구들은 싱그럽게 빛났다. 혼자 눕기에는 넓은 침대에서 일어나, 기지개를 켰다. 어제 몇 시에 잤더라, 어떻게 잠들었더라. 핸드폰을 열어 시계를 보니 아직 아침 8시. 아직 이른 시간인 것을 확인한 후 침대에 털썩, 하고 다시 누웠다. 햇살과 활기찬 웃음소리, 여유로운 아침. 책상 위에는 어젯밤에 먹다 남은 맥주 한 캔과 양념이 묻은 불닭볶음면의 흔적이 남아있었다. 이렇게 평화로운 아침의 풍경에, 옅은 웃음이 새어 나왔다. 나, 어제 정말 잘 쉬었구나.
이로부터 일주일 전, 나는 미팅룸에서 떨고 있었다. 지난 몇 개월간 몰아쳤던 굵직한 프로젝트들. 끊기지 않는 미팅. 새로운 팀에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은 난, 몇 달을 카오스 속에서 보냈다. “잘 모르셔서 그러는데, 저희 팀에서는 그렇게 안 해요.”, “그렇게까지 친해지려고 애쓰지 않으셔도 돼요.” 미팅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면 보이는 새로운 팀원들의 날카로운 눈초리, 무조건적으로 쏟아지는 비판. 친해지려고 애쓰면 보이는 방어적인 태세. 미친듯한 업무량과 텃세에 나는 지쳐있었다. 여느 때와 같이 2평 남짓한 미팅룸에 다 같이 미팅을 하는 도중, 갑자기 이유 없이 몸이 떨리기 시작했다.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두려워지고, 숨이 거칠어졌다. 툭 치면 울음이 나올 것만 같았다. 내 차례의 발표를 간신히 마치고, 도망치듯이 화장실로 도망갔다. 변기 위에 앉아 양손에 얼굴을 파묻었다. 뜨거운 눈물이 쏟아져 나왔다. 내가 왜 이럴까, 오늘은 아무 일도 없었는데. 다시 미팅에 참여해야 하니, 얼른 추스르고 가자. 속으로 수없이 나를 다독이고, 때로는 혼내기도 해도 눈물은 멈추지 않았다. 그렇게 비좁은 화장실 한 칸에서 10분의 시간을 보내고서야, 아무렇지 않은 척 미팅룸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그날 밤, 나는 잠에 들지 못했다. 낮에는 왜 그랬을까. 또 그러면 어쩌나. 다음에 미팅 중에 눈물을 참지 못해서 울어버리면, 프로처럼 보이지 못할 텐데. 잘 참을 수 있어야 할 텐데. 나약한 나 자신에 대해 끝없이 책망하다가, 생각하는 것 마저 지쳐버렸다. 그러다가 든 생각, 떠날 때가 되었다. 잠시라도 숨을 돌릴 틈이, 며칠이라도 멀리 떠나, 이 모든 버거운 것들을 잊어버릴 시간이 필요하다. 그렇게 나는 바쁜 업무들을 뒤로하고, 이틀간의 연차를 냈다.
체력적으로나, 정신적으로 힘든 건 원하지 않았다. 그리고 너무 시골은 싫고, 너무 도시도 싫었다. 한적했으면 좋겠고, 산책할만한 곳이 있으면 좋겠다. 하고 생각했다. 그리고, 책. 책을 읽을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힘든 시간 동안 유일하게 책을 읽을 때 마음이 평안했다. 그렇게 무한히 책에 집중하는 시간을 갖고 싶었다. 이런 면에서 머나먼 강원도나 제주, 지방은 탈락이었다. 그리고 가평은 너무 시골이어서 탈락, 인천은 도시여서 탈락. 그러다 발견한 곳이 파주였다. 내가 사는 서울 관악구에서 차로 운전하여 한 시간이면 가는 곳. 출판사와 북카페가 널려있는 파주 출판단지. 딱 나를 위해 준비된 곳 같았다. 그중 ‘지지향’이라는 숙소를 예약하였다. ‘지혜의 숲’이라는 큰 독서공간과 붙어있고, 밤새 1층 북카페에서 책을 읽을 수 있는 곳이었다. ‘진정한 사유와 묵상의 시간을 보낼 수 있습니다.’라는 문구까지. 몸과 마음이 지친 지금의 나에게 가장 딱 맞는 여행지였다.
여느 때였으면 일찍 일어나 노트북을 켰을 평일 아침, 느지막이 일어나 파주로 향했다. 연락을 받지 않았을 때 밀릴 일들. 팀원들의 눈초리가 아른거렸지만, 과감히 핸드폰의 업무 관련 모든 알람을 꺼버렸다. 왠지 모를 후련함이 느껴지는 아침. 회사를 골탕 먹이는 것 같은 일탈감에 속이 다 시원했다. ㅡ 회사에는 아무런 타격도 없겠지만ㅡ 그렇게 회사를 탈출하여, 파주로 도망가는 길은 경쾌했다. 스타벅스 드라이브스루에서 가장 좋아하는 바닐라크림 콜드브루를 주문하고, 신나는 노래를 들으며 양화대교, 자유로를 드라이브했다. 5월의 따스한 햇살과 푸른빛의 나무들, 창 밖에서 들어오는 시원한 바람. 평일 낮의 한가한 도로. 그리고 모든 짐을 뒤로하고 여행을 떠나는 나. 일주일 전의 톡 치면 울음이 나올 것 같은 나는 사라지고, 신나게 미소 지으며 즐거운 리듬을 타는 나만 남아있었다.
한 시간 정도 드라이브하며 지지향에 도착했다. 파주 출판단지는 낮은 건물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출판사, 건축회사가 많은 오피스 상권이지만 모든 건물이 푸릇푸릇하고 아름답게 꾸며진 곳이었다. 체크인을 하고, 객실로 들어왔다. 정면으로 시폰 커튼이 보였고, 5월 한낮의 강한 햇볕이 들어와, 비스듬히 하얀 침대 위를 비추고 있었다. 연한 우드톤의 책상들. 그 위에 텔레비전 대신 꽂혀 있는 몇 권의 책들. 그 맞은편에 자리한 하얀 침대. 평화롭고 고요한 방의 풍경에, 마음이 가볍게 내려앉았다. 이곳이 내가 쉴 곳이구나. 깨끗하게 세팅되어 있는 침대에 그대로 폭, 하고 누웠다.
나도 모르게 깊은 잠에 빠졌었다. 눈을 뜨니, 어느새 해가 기울고 있었다. 눈앞이 몽롱하고 몸에 힘이 빠져 나른했다. 그에 반해 머리는 텅 비워진 것처럼 상쾌했다. 그새 비가 왔었는지, 촉촉한 공기로 가득했다. 창밖의 나무들은 가벼운 물기를 품고 있었다. 이러다 출판단지를 구경하지 못할 새라, 필름카메라만 들고 밖으로 나왔다. 비가 지나간 출판단지는 고요했다. 나무에는 빗물이 맺혀 있었고, 젖은 나뭇가지와 이파리는 더 진한 색을 보여주었다. 촉촉한 날씨는 이 동네를 몽환적이고, 운치 있는 분위기로 만들어주었다
하천의 나무다리를 건너 출판단지 안쪽으로 향했다. 낮고 소박하지만 문학과 자연의 매력을 보여주는 건물들이 얼굴을 드러냈다. 하천 강둑에는 젖어있는 벤치가 보였다. 통창의 카페에서 책을 읽고, 커피를 내리는 직원이 보였다. 담쟁이넝쿨이 높이 자라 있는 벽돌 건물들, 알라딘 중고서점이 아닌 ‘알낳아딘 중고서점’, 은색 나비가 건물 벽에 붙어있는 파주 나비나라 박물관. 문이 닫힌 조용한 미메시스 아트 뮤지엄. 작은 공원 속에 있는 작은 한옥 건물. 물에 떠 있는 듯한 지혜의 숲과 지지향. 이 모든 풍경을 조용히 걸었다. 그러다 마음에 드는 공간이 나오면, 순간순간 멈춰 서서, 카메라를 들어 그 장면에 포커스를 맞추고, 내 눈과 필름에 출판단지를 담아댔다.
산책을 마친 뒤, 지혜의 숲에 들러 두 권의 책을 빌렸다. 이번 여행의 클라이맥스. 바로 밤샘 독서이다. 체력 여건상 정말 밤을 새울 순 없겠지만, 이 무한한 밤의 시간에, 아무런 제약 없이 책을 읽는 것. 그것이 이 여행의 주된 목표였다. 박상영 작가님의 소설과, 김남희 작가님 에세이집을 하나 집어 들어, 지지향 1층에 있는 문발살롱으로 향했다. 밤의 풍경을 볼 수 있는 통창 바로 앞의 안락의자에 몸을 푹, 넣고 다리를 스툴에 올렸다 살짝 열려있는 문을 통해 윙, 윙 하는 밤벌레의 소리가 들려왔다. 오른쪽에 있는 테이블에 온갖 간식과 맥주가 담긴 텀블러를 놓아두고는, 책을 꺼내 들었다. 그렇게 안락의자와 밤의 무한함에 푹 빠져서, 활자와 종이가 주는 아날로그 한 평안함에 내 몸을 맡겼다. 그렇게 새벽까지, 박상영 작가님의 세계에, 책을 들고 온 세상을 여행하는 김남희 작가님의 세계에 빠져들었다. 그 세계에 빠져 나는 한 남고생이 되기도 하고, 여행자가 되기도 하였다. 그 세계에서는 나의 현실을 잊고, 무거운 마음과 밀린 일. 팀원들의 적대적인 눈빛. 모든 것들을 잊을 수 있었다.
새벽 3시가 넘어간 시간, 함께 책을 읽던 사람들이 하나 둘 방으로 들어가고, 나도 눈이 감기기 시작했다. 텀블러에 담겨있는 맥주는 바닥나 있었고, 하리보 봉지도 이리저리 흩어져 있었다. 지금까지 건강하고 조용한 방식으로 나를 위로했으니, 이제는 좀 불량해도 되지 않을까? 나는 문발살롱 앞의 편의점에서 맥주 한 캔과 불닭볶음면을 하나 사서 객실로 들어왔다. 맥주를 홀짝거리며 불닭볶음면이 다 익기를 기다리다가, 적절히 익은 순간에 불닭볶음면 한 젓가락을 입으로 집어넣었다. 얼얼한 매운맛이 입안에 가득 차며, 무언가 시원하게 내려가는 듯한 카타르시스가 느껴졌다. 나는 혀가 얼얼한 줄도 모르고, 맥주와 불닭볶음면을 신나게 입 안으로 넣었다. 내 얼굴에는 즐거움이 가득했다.
숙소에서 여유로운 아침 시간을 보내다, 다시 서울로 돌아가기 위해 차에 올라탔다. 연휴 전 퇴근시간이라 차가 너무나도 막혀, 두 시간이나 운전해야 하는 여정이었다. 행복했던 여행을 이어, 즐거운 마음으로 집에 가고자 신나는 음악을 틀었지만, 내 마음은 점점 무겁게 가라앉았다. 내가 다시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내가 다시 일을 할 수 있을까? 미래에 대한 걱정이 미팅룸에서 흘렸던 나의 식은땀처럼 쏟아져내렸다. 두려움에 몸이 떨렸다. 그러나, 이번 여행에서 배운 것이 있었다. 다른 것들에 눈치 보지 않고, 온전히 나를 위하는 시간이 소중하다는 것. 내가 좋아하는 산책을 하는 것. 내가 좋아하는 책에 빠져드는 것. 거창한 여행이 아닌, 이런 나를 소중히 여기는 시간이 나를 행복하게 만든다는 것. 온전히 나를 생각하는 시간이 나를 휴식하게 해 준다. 분명 서울로 돌아가, 현실에 치이는 삶은 쉽지 않을 것이다. 또다시 미팅룸에서 도망가 화장실에 숨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이제는 전처럼 그 순간에 회사에서의 평판을, 일이 밀릴 것을 생각하는 것보다는 온전히 나를 생각할 것이다. 그것이 나를 지켜줄 줄 것이다. 그것이 또다시 나를 쉬게 해 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