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실적이고도 못난 지원 동기
어쩌면 나는 천상 직장인 체질일지도 모르겠다. 전혀 다른 두 회사에서 잘 적응하고, 만족하면서 다녔기 때문이다.
게다가 지금 내 나이 서른. 보통 이 나이면 커리어를 전환하기보다는 지금까지 쌓아온 경력을 어떻게 더 잘 활용할지 고민하는 시기일 것이다. 그런데도 나는 로스쿨에 지원하기로 결심했다.
첫 번째로, 직장인으로서 불안감을 느꼈다.
미국 회사에 입사하고 두 달 뒤, 전사적으로 대량 해고가 이루어졌다. 그때 느꼈던 서늘함이란... 회사에서 감사하게도 여러모로 인정을 받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내가 언제든 회사의 필요와 사정에 의해 잘릴 수 있는 인력이라는 사실을 뼈저리게 깨닫게 되었다.
이 업계에서, 이 직무에서, 내가 정말 대체 불가능한, 꼭 필요한 존재가 될 수 있을까? 이 질문에서 시작된 고민은 결국 전문성을 키워야겠다는 결심으로 이어졌다. 직장이 없어져도 회사가 어려워져도, 살아남을 수 있는 존재가 되고 싶었다.
두 번째로, 돈!
한국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연봉을 받고 있기에, 지금 연봉에 아주 만족하며 회사를 다니고 있다. 하지만 장기적으로 봤을 때, 내가 하고 있는 일에서 몇 억대 연봉을 받으려면 임원이 되는 것밖에 없다는 결론에 이르게 되었다. 반면, 미국에서 소프트웨어나 전문직 같은 분야에서 종사하면 상위 몇 프로로 살아남지 않더라도 몇 억대 연봉이 가능한 것이 부러웠다.
무조건 몇 억대 연봉이 탐나서 로스쿨 준비를 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내가 원하는 미래를 생각했을 때, 연봉의 가능성이 조금 더 열려있는 직업군에 도전하고 싶었다.
세 번째로, 준비할 여유가 있었다.
한국에서 4년 동안 회사를 다니며, 정말 관두고 싶었던 순간들이 많았다. 살인적인 스케줄과 못된 사람들에게 치일 때마다 "이직한다," "미국이나 싱가포르로 떠난다" 아니면 "(한국) 로스쿨 가서 너희 다 고소 때린다"라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막상 일이 느슨해지면 현재에 만족하며 그럭저럭 다녔다.
그러다 미국 회사에 입사하고 나서야 비로소 시간이 생겼다. 워라밸이 너무 좋으니 오히려 남는 시간에 미래를 돌아볼 여유가 생긴 것이다. K-직장에서 치열하게 살다가, 갑자기 생긴 이 여유는 나에게 미래를 진지하게 고민하고 준비할 수 있는 시간을 주었다.
네 번째로, 나에 대한 과대평가.
인정하기는 싫지만, 어쩜 나는 나의 능력이나 잠재력에 비해 나를 과대평가하고 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한다. 어렸을 때부터 영재 소리는 듣지 못했지만, 공부를 곧잘 해서 언제나 반에서 상위권을 차지했던 게 화근이었을까? 왠지 나는 나에게 '직장인'이나 '대기업'이 나의 미래라는 것을, 나의 한계라는 것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로스쿨 이후의 나의 삶이 어떻게 펼쳐질지 감도 잡히지 않으면서, 미국 로스쿨에 갔다,라는 희소성에 이끌려, 어쩜 나는 로스쿨에 지원하고 있을 수도...
결국 이렇게 나는 법과는 무관한 이기적이고도 현실적인 이유로 로스쿨에 지원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