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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부산여자김작가 Feb 16. 2019

마지막 통장

(feat. 10년의 기록)



 결혼 이야기가 오고 갈 무렵, 나는 그동안 모았던 통장 잔고부터 확인했다. 대학 때부터 정기적금, 자유적금, 예금 등 여러 개의 통장을 만들고 해지하면서, 10년이 지난 지금까지 살아남은 통장은 단 하나, 청약통장이다. 23살 첫 월급을 받은 후 친구들을 따라 멋모르고 가입했던 통장. 돈이 없는 달은 일, 이만 원부터 여유가 좀 생기몇십만 원까지 그때그때 형편대로 한 푼 두 푼 저금했다. 내 집 마련을 하겠다는 생각보다는 언젠가 시집갈 기약 없는 그날을 위해 중도해지 없이 야무지게 모았었다. 그 시간이 어느새 10년이다.   


 23살 꿈을 찾아 방송국 막내작가로 취직해 돈 백이 되지 않는 돈을 받았다. 사회초년생, 아르바이트를 제외하고 처음 벌었던 돈, 얼마 되지 않은 금액이었지만 차곡차곡 잘도 모았던 것 같다. 이후 혼자 유럽여행을 다녀오며 모아둔 돈에서 절반 정도 썼고 또다시 직장에 들어가 돈을 벌었다. 그러다 대학원 진학을 위해 돈 버는 걸 잠시 중단했고 2년 후 대학원을 마치고 다시 직장에서 돈을 벌었다. 개미처럼 열심히 일만 하며 산 건 아니지만 돈 버는 일에는 결코 게으르지 않았던 것 같다. 현재를 살기 위해서, 미래를 살아가기 위해서 나는 돈을 벌었고 나름 열심히 모았다.(물론 현재를 즐기기 위해 열심히 쓰기도 했다.)  


 그런 나의 10년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청약통장을 꺼내보니 마음이 이상했다. 입금된 금액만 봐도 당시 나의 경제생활이 눈 앞에 그려지는 것 같아 미묘한 기분마저 들었다. 통장 잔액을 떠나 '그동안 열심히 살았구나' 내 어깨를 가만히 토닥여주고 싶었다. 적금을 그때그때 상황에 따라 해지하고 찾는 게 싫어 빛바랜 청약통장에 모든 돈을 밀어 넣었던 게 후회가 되었다. 마음 같아서는 해지하지 않고 그대로 놔두고 싶은 나의 마지막 통장, 이 통장에 더 이상의 시간이 기록되지 않는다는 사실이 나를 슬프게 만들었다.

 

 통장을 해지하러 은행에 간 날, 나는 태어나서 가장 큰돈을 만졌다. 10년간 모은 돈을 실물로 마주하니 기쁜데 슬펐다. 하루하루 지날 때마다 나의 10년과 맞바꾼 돈은 눈 깜짝할 사이에 소비되고 있다. 언제 이렇게 큰돈을 짧은 시간에 써보겠냐 싶어서 즐거운 마음으로 결혼 준비를 하고 있지만 한편으로는 나의 10년이 통째로 사라진 것 같아서 덜컥 겁이 났다. 아쉬운 대로 잔고가 없는 새로운 통장을 개설해야겠다. 새롭게 펼쳐질 내 인생이 기록될 통장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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