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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부산여자김작가 Feb 20. 2019

엄마의 눈물

(feat. 나는 아픈 손가락입니다)


 엄마 쉬는 날 시간을 맞춰 함께 부산 진시장을 찾았다. 그릇이며 한복이며 진시장에 가면 혼수에 필요한 다양한 물품들을 한 자리에서 만날 수 있다고 해서, 우리 모녀도 결혼을 핑계 삼아 오랜만에 데이트를 했다. 층마다 필요한 게 없는지 둘러보는 엄마의 얼굴은 한껏 설레는 표정이었다. 엄마와 함께 혼수를 보러 다니는 지금이 나 또한 너무 행복했다. 엄마의 아픈 손가락이었던 내가 드디어 결혼을 하니 말이다. 말은 하지 않았지만 우리 모녀의 표정은 이미 속마음을 표현하고 있었다.


 양 손 무겁게 혼수 장만하고 집으로 돌아온 저녁, 엄마는 내게 흰 봉투를 내밀었다. 오만 원권 지폐가 두둑이 든 봉투였다. 엄마가 해 줄 수 있는 게 이것뿐이라는 말과 함께. 눈물이 핑 돌았다. 엄마가 준 돈 천만 원은 내게 그냥 천만 원이 아니었다. 엄마가 아침저녁 식당일을 하며 힘들게 모아 온 돈이란 걸 알아서가 아니다. 언젠가 딸이 시집을 갈 수 있을 거라는 작은 기대를 가지고 조금씩 모아 왔을 엄마의 마음이 그 봉투에 함께 담겨 있었기 때문이다. 햇수로 6년째 나는 엄마에게 자랑스러운 딸에서 아픈 손가락이 되어 있었다.


 언제부턴가 나의 연애의 시작은 엄마의 걱정이 되었고 나의 이별은 엄마의 근심이 되었다. 새로운 연애를 시작할 때 즘이면 엄마는 ‘그 친구는 아니?’라고 물었고 이별을 할 때 즘이면 ‘또 그 누가 반대를 했나 보다’ 조심스레 짐작하곤 했다. 6년 동안 똑같은 패턴으로 만남과 이별이 두세 번 반복될 때 즈음 엄마는 우스갯소리로 ‘그냥 엄마랑 같이 살자’며 나지막이 들리는 목소리로 말하곤 했다. 진심이라기보다는 당신의 딸이 더 이상 상처 받지 않았으면 하는 걱정이 더 많이 담겨 있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일까. 결혼을 약속한 친구를 소개하고 상견례를 잘 마친 지금에서야 엄마는 6년 동안 꽁꽁 싸매 왔던 아픈 손가락의 붕대를 푸는 듯 보였다. 우여곡절 끝에 결혼을 하는 딸을 위해 천만 원 밖에 주지 못해 미안해하는 엄마의 마음을 누구보다 잘 알기에 더 미안하고 죄송한 딸일 수밖에 없었다.


 6년 전 내 생일을 갓 지난 어느 날, 나는 결혼 전 마지막 솔로 생활을 만끽하고 있었다. 한 해가 지난 뒤 내 생일에는 ‘남편’이 옆에 있을 예정이었으니까. 그때 우연히 병원을 가지 않았더라면 지금 내 인생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동네 병원에서 피검사를 했을 뿐인데 담당의사는 큰 병원을 가보라고 했다. 택시를 타고 병원으로 가는 길에 문득 드라마 ‘가을동화’ 주인공 ‘은서’가 생각났다. 백혈병에 걸려 오빠라고 알고 자란 ‘준서’의 등에서 마지막 숨을 거둔 그 주인공이 왜 그 타이밍에 생각났는지는 모르겠으나 슬픈 예감은 틀린 적이 없다고 했던가. 큰 병원에 도착하자마자 나는 암센터라는 곳으로 실려 갔다. 하루 만에 참 다양한 검사를 받은 것 같다. 엑스레이 CT 혈액 그리고 골수검사까지. 드라마에서만 보던 골수검사를 직접 하게 된 것이다. 너무 당황스럽고 놀랍고 무섭고 나에게 닥쳐올 앞으로의 시간이 나를 그 시간 속에 가두는 것처럼 무거웠다.


 그렇게 나는 환자가 되었다. 병명은 ‘만성 골수성 백혈병’ 다행히도 다른 암처럼 머리를 빡빡 깎고 무균실에 들어가서 골수이식을 받으며 병을 이겨내는 그런 일은 나에게 일어나지 않았다. 네 알의 항암제를 매일 같은 시간에 한번 먹기만 하면 치료가 되는 참 고마운 병이었다. 그렇게 6년 동안 나는 매일 아침 8시, 항암제를 먹으며 치료를 했다. 어느새 나는 환자이자 건강관리를 잘하지 못한 죄인이 되었고 나의 일상은 많은 것이 변해갔다. 그런 모습을 오롯이 옆에서 지켜본 엄마이기에, 나의 상처의 깊이를 누구보다 잘 아는 엄마이기에 지금 엄마의 마음이 십분 이해가 된다. 나의 결혼을 누구보다 반기는 엄마가 곁에 있어서 나는 더 행복해지려 한다. 어떤 일이 있어도 한 번도 엄마의 눈물을 보지 못했기 때문에 그 눈물을 끝까지 지켜주고 싶다. 다시 태어나 엄마가 나의 엄마가 아닌 딸로 태어난다면, 나는 지금의 엄마처럼 잘 견뎌낼 수 있을까. 엄마라서, 엄마이기에 억지로 꾹 참고 있던 그 눈물을 적어도 나는, 터트리고 싶지 않다. 더 이상 나는 엄마의 아픈 손가락이 아닐 것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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