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벤다 꽃따기 체험
매년 여름, 홋카이도를 찾는 우리가족이 빼먹지 않고 하는 연중행사가 있으니
그것은 바로,
후라노富良野에서 라벤다 꽃 따기...!
아… 기나긴 겨울이 물러간 4월, 봄날의 따스한 햇살을 코끝으로 느끼며 눈을 지그시 감으니, 아직 눈덮인 봉우리의 대설산과 후라노의 푸른 하늘이 그림처럼 내 마음에 펼쳐진다. 대설산을 배경으로 끝 없이 펼쳐진 라벤다 밭 한귀퉁이에 앉아 꽃을 꺾고있는 우리 가족의 모습도. 대지는 온통 바람에 하늘거리는 라벤다꽃과 그 향기로 가득하다. 흐드러지게 핀 라벤다 꽃밭 속에서 꽃을 따는 아이들의 발그스름 상기된 얼굴은 밀짚모자에 가려 보이지 않는다. 아마도 이제껏 아이들과 함께 했던 숱한 체험들 중에서도 아름다운 추억 베스트 5에 꼽을 장면.
그래서 소개해본다. 후라노에서 라벤다꽃 따기는 어떤 체험인지.
먼저 후라노가 어떤 곳인지부터 간단히 소개해보자.
후라노는 홋카이도의 내륙 중앙에 위치한 인구 2만의 작은 농업도시. 동쪽으로는 홋카이도의 척추인 토카치 산맥과 타이세츠산을, 서쪽으로는 유바리 산맥으로 연결되는 아시베츠산을 바라보고 있다. 전형적인 분지 기후로 겨울엔 영하 20도까지 내려갈 정도로 춥고 많은 눈이 내리며, 여름은 일조량이 높고 다른 홋카이도 지역에 비해 꽤나 더운 편이다.
여름의 뜨거운 태양을 듬뿍 받은 농작물, 과일, 그리고 각양각색의 꽃들이 웅장한 설산 아래에 펼쳐진다. 후라노의 광활한 평야와 구릉지대에 펼쳐진 꽃밭의 풍경이 바로 관광객들에게 익숙한 후라노의 여름 대표 이미지이다.
그 중에서도 후라노를 지금의 관광명소로 자리매김하는데 절대적인 공헌을 한 주인공이 바로 라벤다이다.
라벤다는 병충해와 습기에 약해 재배하기 까다로운 꽃이다. 일본의 한 향수장인이 프랑스 남부에서 5킬로그램의 라벤다를 일본에 가져온 것이 1937년. 이후 일본 각지에서 이 라벤다를 가지고 시험재배가 이루어졌고, 기후와 토질면에서 홋카이도가 라벤다 재배에 가장 적합하다는 것이 판명된다. 이후 라벤다 재배가 본격화되어 후라노의 많은 농가들이 라벤다 재배에 뛰어 들었고, 라벤다에서 추출한 향수와 오일 판매도 급증, 1970년에는 라벤다 오일 생산량이 5톤에 이른다. 그러나 이런 호황도 잠시, 얼마 지나지 않아 합성향수를 필두로 한 수입산 향수의 공세로 라벤다 매출이 급감하면서, 인건비를 감당하지 못해 농부들이 눈물을 삼키며 라벤다 줄기들을 죄다 뽑아버리는 일이 속출하게 된다. 결국 후라노의 일부지역을 제외하고 홋카이도 전도에서 라벤다 밭은 점차 사라지게 된다.
그렇게 라벤다 밭이 점점 홋카이도의 평야에서 사라져가던 1976년, 일본의 국철 달력에 후라노의 사진 한장이 소개되었는데, 대설산 배경의 흐드러진 라벤다밭의 이 사진이 일본 전역에서 갑작스럽게 주목을 받게된다. 달력이 가져온 행운은 놀라운 것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이 라벤다 밭을 보려고 일본 각지에서 관광객들이 후라노로 몰려드는 지경에 이르렀으니 말이다. 라벤다 재배의 선구자였던 토미타팜를 필두로 크고 작은 농장들이 다시 적극적으로 라벤다를 재배하게 되면서, 후라노=라벤다라는 지역브랜드는 성공적으로 정착되었다.
라벤다를 비롯한 다종다양한 꽃들의 향연을 한 곳에서 감상하기로는 역시 팜토미타ファーム富田만한 곳이 없다. 꽃이 개화하는 7월 초 성수기가 되면 일본 각지에서, 최근에는 해외 관광객들이 구름같이 몰려든다. 다행히 농장이 워낙 넓고 여러 종류로 분산되어 있어서 피크시즌에도 사람에 치여 스트레스 받을 정도는 아니다. 청명한 하늘 아래 드높은 설산, 그 밑에 아름다운 색색깔의 꽃이 펼쳐진 구릉과 대지를 바라보자면 마음 한켠에 남아있던 걱정과 근심이 어느샌가 다 사라져버린다. 포프리, 오일, 비누 등 라벤다를 이용한 상품라인도 훌륭하게 갖춰져있다. 농장 전체를 라벤다로 브랜딩하고 있다보니 약간 지나칠 정도의 보라색 사용이 귀엽기도 하고, 보라색을 사랑해마지 않는 나의 눈에조차 약간 거슬리기도 한다. 간판도, 종업원들 옷도 직원용 스쿠터도, 심지어 아이스크림도 모두모두 보라 보라 보라~
이 라벤다 밭의 매력에 흠뻑 빠진 우리가족은 단체관광객이 오지 않는 좀 한적한 농장을 찾기 시작했고 결국 ‘사사키농장(彩香の里 佐々木ファーム)'이라는 좀 작은 규모의 라벤다 농장을 발견했다. 이 농장에서는 돈을 내고 라벤다 꽃을 꺾는 체험을 할 수 있다. 체험 좋아하는 아이들에게 꽃 ‘구경’은 시큰둥해도 꽃 ‘꺾기’는 신나는 놀이라는 것을 알게 된 후, 매년 여름이면 어김없이 사사키농장을 찾게 되었다. 라벤다를 여유있게 즐기기 위한 엄마의 고도의 책략이랄까. 아이들은 꽃 꺾느라 바쁘고 나는 꽃 구경하느라 행복하니 우리가족에게는 맞춤체험이 아닐 수 없다.
먼저 사사키농장의 접수처에서 700엔을 내면 전용 비닐봉지와 가위를 준다. 이 도구들을 가지고 뒤쪽 언덕에 오르면 숲을 등진 아름다운 라벤다 밭과 만나게 된다. 밭 한 쪽에 밧줄로 표시된 라벤다 꽃 꺾기 전용 구획이 따로 있다. 그 구획을 내키는대로 돌아다니며(물론 꽃을 밟지 않게 조심하면서) 마음에 드는 라벤다 꽃 줄기를 가위로 조심스럽게 잘라 비닐봉지 안에 차곡차곡 모으는 것이다. 그렇게 약 한시간 정도 라벤다 꽃밭에서 아이들은 더 예쁜 꽃송이를 찾아 꽃밭을 헤매고 이마에는 땀이 송글송글 맺힌다. 그러다 잠시 고개를 들면 시원한 바람이 땀을 닦아주곤한다. 그렇다. 이 농장의 가장 큰 매력은 라벤다 꽃을 모으다가 땀을 닦느라 허리를 펴느라 잠시 고개를 들면 바로 눈앞에 펼쳐지는 후라노 마을의 아름답고 평화로운 전경이다. 바람에 하늘거리는 라벤다의 보랏빛 꽃향기에 한번, 아름다운 후라노 마을의 풍경에 또 한번 취한다. 소소한 노동의 결실과 휴식이 주는 기쁨을 잠시 아이들과 나눌 수 있는 귀한 기회이기도 하다.
둘째 녀석이 네살때부터 시작한 라벤다 꺾기는 그로부터 5년 내내 우리가족 연중행사로 자리잡았다. 두 봉지 가득 담은 라벤다꽃은 우리가 머무는 숙소 베란다 한켠에서 일주일 내내 따뜻한 햇살을 받으며 건조된다. 홋카이도에서의 여름생활을 끝내고 고베로 돌아가는 우리 차에 모든 짐이 다 실린 후 가장 마지막에 오르시는 고귀한 몸이 바로 말린 라벤다꽃 묶음이다.
이렇게 홋카이도에서 페리타고 바다 건넌 라벤다 꽃들은 우리집의 거실, 각방, 화장실 곳곳에 놓여진다. 덕분에 온 집안은 라벤다 향기와 늘 함께한다. 화학약품을 사용한 인공 방향제가 아닌 천연 그대로의 라벤다 향은 의외로 꽤나 오래가서 한 1년은 족히 향기가 나는 것 같다. 라벤다향이 사그러질 때쯤 다시 홋카이도에서 여름을 보내기 위해 페리를 타고 라벤다를 꺾는 사이클이 자연스레 만들어진다. 어쩌면 우리 가족은 라벤다 꽃향기가 부재한 집을 견딜 수 없어서 여름행선지로 번번히 홋카이도를 택하는 것은 아닌지.
이번 여름에도 어김없이 홋카이도로 향하는 우리가족, 다른건 몰라도 라벤다 꽃 따러 후라노 가는 일정은 올해도 당연히 빼먹을 수 없을 듯 하다. 4년 전 꽃을 처음 따던 아이들의 조그맣고 통통하고 서툴던 손가락은 어느새 엄마 손가락만큼 길어져 있다. 이제 꽃따는거 시시하다고 더이상 안하겠다고 할 날도 언젠가는 찾아오겠지. 뭐 그렇게 우리가족의 라벤다 채집의 역사는 막을 내리겠지만, 라벤다 꽃 따느라 땀 송글 송글 맺어있던 아이들의 진지한 얼굴은 내 아이들의 가장 사랑스럽던 모습 중 하나로 오랜 시간 기억될테니, 서운함의 크기는 생각보다 그렇게 크지 않으리라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