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기들과 대학 생활을 통해 얻은 인사이트
살면서 한 번도 무엇이든 한 번에 이룬 적이 거의 없다. 그래서 몇 번이고 다시 시도하는 게 당연한 줄 알았다.
대학 수능을 망치고 원하지 않은 대학에 입학하면서 재수하고 싶었지만, 쌍둥이 남동생이 먼저 재수하겠다고 선언하면서 자연스레 포기했다. 그게 마음의 한이 돼서 대학교 1학년 1학기 내내 적응하지 못하고 어영부영 대학 생활을 했다. 어차피 오래 다닐 학교가 아니라고 생각해서 동기들과도 친하게 지내지 않고, MT, 과대 모임 등 학교생활도 참여하지 않았다. 당연히 성적도 엉망이었다. 그땐 편입해야지 생각만 가득했고 그렇다고 딱히 편입 준비를 하지도 않았다. 인생 처음으로 굉장히 우울하고 게으른 시간이었다. 마음으론 의지가 있는데 몸이 따라주지 않았다. 자고만 싶고 만사가 귀찮았다. 그래도 모범생의 생활은 배어 있어서 아침마다 일어나서 출석하고 과제를 했다. 기계같이 다녔던 것 같다.
친구는 없었지만 마음을 의지하며 같이 다닌 동기이자 언니가 있었는데 당시 언니는 이미 다른 대학에 다니다가 다시 수능을 보고 입학한 거라 학교생활을 굉장히 열심히 했다. 왜 친해졌는지 기억은 안 나는데 자연스레 친해졌고 언니만 잘 따랐던 것 같다. 내가 3.0을 겨우 넘는 학기 성적을 받았을 때 언니는 4.0을 넘는 우수 성적을 받았다. 그땐 의지가 없어서인지 그게 부럽지도 않았다. 첫 성적을 받고 되레 놀란 건 언니였다. 내 성적을 보고 진심으로 혼을 냈다. “이렇게 해서는 편입할 수도 없고 다시 수능을 본다 해도 혹시 모르니 일단 성적은 잘 받아야 해” 듣고 보니 맞는 말이었다.
한 학기 성적을 망치고 방학이 됐다. 방학이 되니 되려 정신이 차려졌다. 아무것도 한 것 없이 이렇게 한 학기를 보낸 게 충격이었다. 남은 거라곤 재수강을 해야 하는 성적표가 전부였다. 정말 문득 정신이 차려져서 그날로 컴퓨터 학원에 등록했다. 다른 건 몰라도 기술은 배워놓아야 할 것 같았다. 그래서 아침마다 컴퓨터 학원에 가서 학기 중보다 더 열심히 수업을 들었다. 방학 동안에 포토샵, 일러스트를 다 마스터할 수는 없었지만, 학기가 시작하고 포토샵 수업에서 처음으로 다른 학생들보다 앞서나갔다. 교수님을 도와 따라오지 못하는 친구들을 가르쳐 주었고 그러면서 동기들이랑 친해졌다. 그렇게 스펀지에 물 스며들 듯 자연스럽게 대학 생활에 적응했고 학교생활을 열심히 하다 보니 2학기엔 3.9 학점을 받았다. 그 뒤론 장학금도 받아보고 나름대로 평균 3.8을 유지하며 대학 생활을 했다. 주전공이 나와 맞지 않아 복수전공을 하기 전까진 나름 모범생으로 학과에서 이쁨을 받으며 학교생활을 이어갔다.
중학교 때도 1학기와 2학기의 평균 점수 차가 1점이나 났는데 대학생이 되어서도 똑같았다. 진작에 잘했으면, 열심히 했으면 좋았을 텐데, 항상 깨달음이 느리고 적응도 천천히 한다. 참 한결같다.
동기 언니가 해 준 충고가 아니었으면 이마저도 더 느리게 깨닫고 일 학년을 날렸을 거다. 그나마 반 학기만 방황하고 끝난 게 다행이지 싶었다. 내경운 주변 친구들의 영향으로 빨리 벗어났지만 보통 대학에 들어가서 방황하는 주변 친구들을 꽤 많이 보았다. 실제로 같은 동기 중 10명의 3명꼴로 학교를 그만두거나 유학을 가거나 어느 날 갑자기 사라진 친구들도 있다. 나중에 듣기론 후에 복학했다고 들었던 것 같다.
정해진 수업에 같은 과목의 수업을 듣고 대학 합격이라는 같은 목표를 바라보며 고등학교 생활을 하다가, 갑자기 내가 스스로 과를 결정하고 수업을 짜고 누구도 채근하지 않는 수업을 듣는 대학 생활이 시작되면 대부분은 그 생활에 한 번에 익숙해지기 어렵다. 고등학생과 대학생의 차이는 내가 느끼기엔 내 일상이 뒤집어지는 경험이었다. 누가 미리 공지라도 해줬으면 준비라도 했을 텐데… 더구나 원하지 않은 대학, 생각지 못한 점수에 맞춰 선택한 전공 수업은 진짜 내가 상상한 대학 생활이 아니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전공도 더 심사숙고해서 결정했을 텐데… 아니 심사숙고해서 결정할 선택지도 없었다. 내가 뭘 해야 하는지 도무지 알 수 없었으니깐…
그나마 나는 나았다고 생각한다. 고등학교 1학년 때부터 디자인학과 전공을 목표로 미대 입시 준비를 했으니깐. 다만, 디자인전공이 이렇게나 많이 나뉘어 있을 줄이야,,, 내가 아는 거라곤 그림 그리는 게 전부였는데 디자인도 적어도 10개 이상의 전공이 있었다. 당연히 난 무슨 전공이 있는지, 뭔가 하고 싶은지 들은 적도 누가 물은 적도 없어서 대학에 들어가면 누군가 알려주는 줄 알았다.
‘너는 이걸 하면 돼’ 하고….
무슨 공부를 하고 싶은지, 어떤 전공이 나한테 맞는지는 몰랐지만 지금 내가 성적에 맞춰 선택한 이 전공이 나와 맞지 않다는 것은 알았다. 수능성적을 보고 미술학원 선생님이 정한 전공이 나와 맞을 리가 없었다. 나에 대해 잘 모르는 타인이 정해준 전공이 맞을 확률이 얼마나 될까? 장담하건대 수능 만점 받을 확률보다 낮다고 생각한다. 여하튼 나는 선생님이 정해준 전공으로 도자기 전공을 하게 됐었는데 1학년 1학기 이후 정신 차린 덕분에 그냥저냥 다니면서 성적은 잘 받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평생 도자기를 빚으며 살 수는 없었다. 그래서 2학년을 마치고 고민 끝에 미술 전공자 사이에서 흔하디 흔한 시각디자인을 복수 전공하게 된다. 이때부터 대학 생활에 파란만장한 스토리가 펼쳐진다. 이때는 몰랐다. 도자기 전공 선배들의 자부심을 내가 타 전공 복수전공을 하면서 선배들의 자부심에 금이 갔다는 것을.. 그리고 그건 교수님들도 마찬가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