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대에 겪었던 뇌종양 투병에 관한 기록을 남기려고 했는데 게으른 탓에 글을 통 못 썼다. 그렇게 10년이 흘렀다. 이젠 당시에 기록하고 싶었던 에피소드도 가물가물, 기억이 흐릿해졌다. 조각나버린 기억에 살을 덧붙일수록 인위적이라는 생각만 들었다. 내가 하고 싶었던 이야기는 이게 아닌데… 싶은 마음에 썼다 지우기를 반복했다. 내 삶을 박제하겠다는 당찬 포부는 그렇게 물거품이 되나?
아니, 인생의 파도는 나를 가만히 두지 않았다.
30대는 강직성 척추염과 함께해야 한다고 하네? 심지어 이 병은 완치의 개념이 없기 때문에 평생 안고 가야만 한단다. 싸워 이겨야 하는 병마가 아니라 언제고 곁에 있는 친구 같은 병우(?)라고 해야 하나.
뇌종양이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는 하늘이 두 쪽 나는 듯하더니만 강직성 척추염이라는 진단에는 생각보다 무던하다. 큰 병을 앓았던 경험이 마음 근육을 강하게 만들어주었구나 싶다. 문득문득 나한테 왜 이런 시련이 두 번이나 왔는지 착잡하면서도, 이미 한 번 해봤으니까 누구보다 잘 이겨낼 수 있겠다는 의지도 생긴다. 그리고 당장 머리를 열어 수술해야 했던 뇌종양과 달리 수술하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이 조금 위로가 된다.
1) 증상
처음 허리가 이상하다고 생각한 건 3월. 그 이전의 통증은 잘 기억나지 않는다. 원체 통증에 둔감하기도 하고, 운동한 다음 날 등이 뻐근한 정도로 생각하고 넘겼던 듯하다. 3월 초쯤부터 아침에 일어날 때 유독 등을 움직이기가 힘들다는 느낌이 들었다. 중순께부터는 일어나기조차 힘들 만큼 통증이 심했고, 이건 우습게 넘길 통증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인터넷에 ‘아침에 등 통증’만 검색해도 강직성 척추염 정보가 쏟아졌다. 아침에 일어날 때 통나무처럼 뻣뻣했다가 움직일수록 점차 나아지는 증상이 딱 내 이야기였다. 침대가 아닌 바닥에서 자면 통증이 완화된다기에 따라 해봤더니 정말이었다. 통증의 원인이 강직성 척추염이라는 확신이 60% 정도 들었다. 나머지 20%는 부정하고 싶은 마음, 20%는 혹시 암이 척추 쪽에 생긴 건 아닐까 하는 불안감이었다.
집 근처에는 로컬 류마내과가 없어서, 급한 대로 종합검진이 가능한 병원의 내과에 방문했더니 증상만 듣고 바로 소견서를 써주었다. 집에 돌아와서는 도통 일이 손에 안 잡혀서 유튜브, 구글, 네이버를 싹 다 뒤져보았다. 강직성 척추염도 류마티스 관절염처럼 엄지발가락이 퉁퉁 부을 수 있다는 글을 보았다. 강직성 척추염에 대한 확신이 80%까지 치솟았다.
1년 전쯤 우측 엄지발가락이 통풍처럼 불어서 정형외과에서 X-ray와 혈액 검사를 한 적이 있다. 검사 결과 약간의 염증 수치만 있을 뿐 통풍도 류마티스도 정상이라고 했다. 그때 류마내과에 갈지 말지 고민했는데, 고민하지 말고 갔어야 했다는 후회가 들었다. 하지만 후회하기엔 늦었고 지금이라도 큰 병원에 가야겠다고 마음먹었다.
2) 진단
집에서 제일 가까운 병원은 5월 말까지 예약이 꽉 찼다고 해서 어디로 가야 할지부터 선택하기 어려웠다. 혼자 결정하기엔 중대한 문제인 듯하여 부모님과도 상의해 보았다. 상의 끝에 혹시나, 정말 만에 하나, 척추 관련 암일 경우를 대비해서 뇌종양 수술을 했던 건대병원으로 가기로 결정했다.
담당 교수에게 증상이 시작된 지 2~3주쯤 됐다고 말하니 “기간이 너무 짧은데… 보통 우리하게 오래 앓다가 오는 분이 많은데”라는 답변이 돌아왔다. 이 한마디에 강직성 척추염이 아닐 수도 있다는 희망이 조금 싹텄다. 병원에 간 당일에는 유전자 검사를 위한 채혈만 하고, 일주일 뒤에 MRI를 찍었다. (원래 하루에 다 할 수 있는데 MRI 예약이 어려웠다. 아까운 내 연차…) 일반적인 소염진통제를 2주 치 처방해 주었는데 먹고 나니 통증이 줄어들어 자꾸만 희망이 고개를 쳐들었다.
그러고 4월 11일 화요일, 검사 결과가 나왔다. 강직성 척추염이었다. 심지어 유전자 요인도 나왔다고. 우리 집에는 류마티스 질환을 앓는 사람이 없어서, 정말 생각지도 못했다. 우리 가족의 유전자 어딘가에 숨어 있던 이 녀석이 그냥 나한테만 나타났구나. 다른 가족이 아니라 내가 아파서 다행인 건가. 걱정했던 암이 아니어서 또 다행인 건가.
일단 한 달 치... 아침밥 안 먹는데 아침약은 최악이다.
이제부터 내가 해야 하는 일과 하면 안 되는 일에 대해서 물어보고 씩씩하게 병원을 나섰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엄마는 자꾸 밀가루를 적게 먹어야 한다, 불에 구운 고기 대신 삶은 고기를 먹어야 한다 등등 음식 이야기를 했다. 난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다. 암에 걸렸을 때부터 알았다. 병이라는 건, 내가 뭘 먹든 어떻게 살든 걸렸을 거다. 앞으로 어떻게 이겨내는지가 중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