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llion - GASSHOW
한이 세상을 떠난 후, 한의 동생은 공개적으로 이런 글을 썼다.
"나이브한 동생에게 부조리한 세상을 외면하지 말라고 다그치던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사람에게 위로가 될 수 있는 드라마를 만들겠다며 PD가 되었습니다.
…
드라마를 찍는 현장은 무수한 착취와 멸시가 가득했고, 살아남는 방법은 구조에 편승하는 것뿐이었습니다. 저항, 아니 작은 몸부림의 결과였을까요. 한은 현장에서 모욕과 과도한 노동에 시달리고 인사 불이익을 당했습니다. 언제나 치열하게 살아왔던 한이, 자신이 꿈꾸었던 공간에서 오직 비열하게 살아야하는 현실에 갇힌 것입니다.
…
형이 그들에게 행한 잘못이 있었다면, 회사가 가진 구조적인 문제를 남들만큼 조용히 넘기지 못했을 뿐인데, 아무렇지 않게 폭력이 벌어졌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회사는 당당하게 모욕이 없었고 근태 문제가 원인이었다고 주장을 하고 있었습니다."
다시 읽어본 글은 한 글자 한 글자가 마음을 후벼판다.
당시 나는 미소와의 짧은 대화가 참 힘들었는데. 한의 마음은 나보다 100배, 아니 1000배는 더 힘들지 않았을까.
사람의 마음이 무너지는 건 쉽고 잔인하다. 그러니까 한은 무너질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한을 뒤에서 바라보던 나는 갑자기 깨달아버렸다. 나는 이제 한과 같은 곳에 서 있었다.
세상을 떠난 한은 여전히 대단하지만, 하늘을 앞질러가던 한은 거기에서 멈추어섰다.
땅에 붙어 따라가던 나는 멈춰선 한이 온 그 지점까지 와버렸다.
한을 따라갈 순 없었다. 그러니 이제는 한을 앞질러야 했다.
제2의 미소가 내 앞에 나타났을 때 나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조금 더 강하게 청원을 넣을지, 공개석상에서 언급을 할지, 미래를 도모할지, 과거를 붙잡을지, 현실의 경계에서 버티고 있을지.
답이 무엇이든 이제는 무언가를 스스로 골라야 했다. 더이상 한은 나의 앞에 있지 않았다. 나는 한이 없는 세상에 비로소 홀로 던져졌다.
한이 세상을 떠나기 전 친구와 사주를 본 적이 있다.
사주쟁이 할아버지는 나에게 명예욕과 정의감이 있는데, 서른 후반쯤 갑자기 금전욕으로 돌아선다고 했다.
"돈을 바짝 벌려 하지 마, 너 스스로를 버리게 돼. 돈은 자연스럽게 따라오게 놔 둬" 라는 충고가 기억난다.
당시 나는 웃었다. 앞의 말은 상당수 인정했으나, 뒤의 예측은 내 쪽에서 거절하고 싶었다.
금전욕은 내가 아는 한과 거리가 먼 단어였다. 그래서 나는 당시, 금전욕이 넘치는 사람까진 되고 싶지 않다는 생각을 했다.
2024년 현재도, 여전히 그런 사람은 되지 않고 싶다.
사주를 공부했던 친구 어머니의 이야기를 전해들은 적이 있다. 늦게 공부를 시작한 명리학이 통계학과 놀라울 정도로 흡사하다나.
통계라 하면 늘상 변수는 존재하기 마련이다. 나는 어째 한이란 존재가 20대 삶의 변수였다는 생각이 든다.
한이 이 세상에 없게 된 후에야 나는 한을 보다 많이 되새김질하며 살고 있다.
현재 한의 가족은 '한빛미디어노동인권센터'라는 시민단체를 만들어 활동하고 있다.
"방송사 및 미디어 산업에 근무하는 비정규직 및 취약 노동자들의 권익 보호와 복지 증진 및 낡은 방송 제작 환경 개선에 힘쓰고 있습니다"
방송사 밥을 먹고 사는 나는 이 소개글이 늘 부끄러웠다.
그러면서도 마음 한 구석에서 한을 놔두고, 그와 나눈 고양이와 셀카 이야기를 생각한다.
고 이한빛 피디. 스무 살 나의 등불이었던 그에게 이제서야 겨우, 부디 편히 쉬었으면 좋겠다는 말을 적는다.
-끝-
PS.
한을 위한 글을 쓰게 한 노래는 일본의 노다 요지로라는 가수가 부른 GASSHOW 였다.
2011년 동일본대지진의 희생자들을 추모하는 이 노래를 나는 한에게 바치고 싶다.
猛た波が喰らうは千の意思と
万の生きし御霊と一片の祈り
幾年がまとめて刹那に果てた陸に
何を唄へば 再び光は芽吹く
今はこの調べを蒔いて
彷徨う友が 帰る道しるべとして
맹렬한 파도가 집어 삼킨 것은 천 개의 의지와
만 개의 살아 움직이던 영혼, 그리고 한 편의 기도
몇 천 년이 일순간에 끝나버린 육지에서
무엇을 노래하면 또 다시 빛이 싹틀까
지금은 이 가락을 흩뿌리네
방황하는 벗에게 길잡이가 될 수 있도록
出逢えたから ここに在るこの
空っぽだから大事にするよ
運命か 采か 昨日と今日の
狭間に終えた 君の御霊と
만났으니까, 여기에 있는 거야
텅 비어 있으니까, 소중히 다룰게
운명일까 기회일까 어제와 오늘의
틈새에서 잃어버린 네 영혼과
引き換えに得た この身のすべては
形見だから 守り通すよ
はじめてだよ 跡形も無い君に
声を振るわせ 届けと願うのは
맞바꿔 얻어낸 이 육신은
유품이니까 꼭 지켜낼게
처음이었어 흔적도 없이 사라진 너에게
떨리는 목소리로라도 닿기를 빌었던 것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