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영장 비밀연애
우리 센터에 뿌리를 내린 지 어연 1년 8개월. 직장은 주 5회 가지만 수영은 주 6회를 간다. 그 탓에 내가 가장 자주 만나는 사람들은 수영장 사람들일 것이다. 그들은 나의 쌩얼도 알고, 알몸도 알지만, 그러나 이름도 몰라요 성도 몰라요 아-얄미운 사람~이 바로 나다. 아, 강습날에 간혹 출석을 불러서 내 이름을 몇 분이 외우셨다. 그만큼 나는 나의 신상 보호에 힘을 쓰고 있다. 신상이 밝혀지는 건 너무 쑥스러운 일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남자친구가 우리 센터에 다니게 되었다. 아주는 아니고 한시적 이벤트였다. 작년에도 몇 번 우리 센터에서 수영을 한 적은 있었지만 시간대를 다르게 간 탓에 마주칠 일은 없었다. 하지만 나의 영향으로 새벽수영 인간이 된 그는 이제 나와 같은 시간대에 수영을 하게 되었다. 물론 나는 상급반이고 그는 중급반이지만. 후후.
여기서 잠깐 우리를 소개해본다. 우리는 대학 CC였다. 교제를 막 시작했을 무렵에 나는 그에게 제안했다. 캠퍼스 내에서는 손도 잡지 말고 뭐 막 대단히 사귀는 티도 내지 말자고. 나처럼 멋진 여성을 사귀는 것을 그는 널리 널리 알리고 싶었겠지만 말이다. 하지만 이 약속이 무색하게도 금방 들켜버렸다. 또 의외로 애정표현을 하고 싶어 안달복달 난 것은 나였으므로 차라리 마음이 편했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랐다. 나는 어엿한 사회인이고, 수영장에서의 내 신상은 아무도 몰랐다. 그런데 이 사람이 바로 내 남자친구요-! 하고 티 내고 다니는 일은? 어불성설 언감생심.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수영장에서는 우리 모른 체 하자고 약속을 했다. 남자친구는 ‘뭘 그렇게까지..?’의 눈치였으나, 이 수영장에 계속 다니고 곤욕을 치러야 하는 건 나였기에 납득했다. 우리의 약속은 이랬다. 첫째, 센터로 들어가는 계단 앞부터는 서로 모르는 척 하기. 둘째, 나는 씻는 게 오래 걸리니 바로 퇴수 하고, 남자친구는 쉬는 시간 10분 더 수영하고 퇴수 하기. 셋째, 먼저 다 씻은 사람이 로비에 앉아있다가 눈 마주치면 자연스럽게 일어나서 나가기. 이러한 우리의 약속 덕분에 무사히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을 수 있었다. (아마도)
잠시나마 연예인들이 비밀연애 하는 기분을 체험할 수 있었다. 그리고 나는 연예인은 안 하길 잘했다 싶었다. 도대체 어떻게 들키지 않고 연애를 할 수 있을까? 입수하는 길엔 벽에 걸린 거울에 내 수영복 자태도 확인하고 우리 레인을 향해 가며 강사님과 눈 마주치며 인사 타이밍을 쟀었다. 이제는 수영복 자태고 인사고 뭐고 그가 중급 레인의 어디쯤 수영을 하고 있는지 그의 수모만 찾게 되더라. 진급 후엔 옆 레인을 볼 겨를도 없이 우리 반 진도 따라가기만 바빴다. 그런데 이제는 틈만 나면 옆레인을 엿본다. 내가 만약 연예인이라서 누군가 내 직캠을 갖고 있다면 나는 단박에 내 비밀 연애를 들켰을 것이다.
약속된 기간이 지나 그는 홀연히 우리 센터에서 사라졌다. 중급반 강사님만이 출석을 부르며 그의 이름을 외친다. “000님~ 000님 안 오셨나요?” 네. 그는 이제 당분간 오지 않아요. 그의 정체를 아는 나만 마음속으로 대답한다.